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평 Jun 05. 2022

열매는 괴로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저녁식사와 함께 가벼운 반주를 즐기곤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매실 담금주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통의 커다란 유리병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금빛의 탐스러운 매실이 술 속에 가득 담겨있었다. 엄마가 술을 따를 때마다, 병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매실이 나는 늘 궁금했다.


저건 대체 무슨 맛일까?


하지만 엄마가 절대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둔 탓에 그 금빛 매실은 눈으로만 만끽할 수 있고 절대 만질 수는 없는, 내게는 마치 전지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 위에 굴러다니는 전지현 동그란 매실을 발견했다.

나는 이게 무슨 횡재냐 싶어 길바닥 이곳저곳에 떨어진 매실을 줍기 시작했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것 같은 매실들이 사방천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이렇게 매실이 천지인 곳이 있었다니!

나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된 듯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그를 맛볼 차례인가!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집을 비운 틈을   앞마당에 매실들을 놓고 벽돌로 쿵쿵 한참을 찧었다.


아 그런데 뭐지 이 스멜은…? 매실주는 분명 달달하고 향긋한 느낌이었는데..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그 냄새가 너무나도 꼬리꼬리 했다. 그래서 당연히 맛볼 생각도 싹 사라져 버렸다. (상상과 현실은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온몸이 미친 듯이 간지럽기 시작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몸이 단풍잎처럼 빨개져 잠을 설치는 딸을 발견한 엄마는 미처 숨기지 못했던 냄새를 눈치채곤 왜 은행을 만져서는 이 사단을 만들었냐며 한밤중에 대노했다.


그렇다. 그날 내가 매실인 줄만 알고 있던 동그란 열매는 매실이 아니라 은행이었던 것.

그것을 매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맨손으로 주물러가며 돌로 짓이기까지 했으니… 은행 독이 잔뜩 오른 내 몸은 두드러기로 금세 뒤덮여버린 것이다.

죄 없는 선량한 은행을 괴롭힌 죄로 극심한 두드러기와 덤으로 야단도 맞았던 나의 슬픈 옛날이야기.


요즘은 자주 보이지 않지만, 가끔씩 길 위에 떨어져 짓이겨진 은행 열매를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은행은 생각보다 꽤 무섭더군요. 조심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차 안에 모과 하나쯤은 있잖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