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평 Jun 20. 2022

그들 각자의 행운목

16. 행운목 이야기


우리 각자 사무실에서 행운목 한 번 키워볼까?


남자 친구와 나는 10년 가까이 만나는 동안 그 흔한 커플링이나 커플 옷 같은 것을 사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각자의 사무실에서 커플 식물을 한 번 키워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뜬금없이 행운목을 키워보자고 남자 친구에게 제안했다.

생각해보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우정 식물이라며 식물 선물을 그렇게 해줘 놓고는 정작 나의 최최측근인 남자 친구에게는 단 한 번도 식물을 선물해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커플 아이템이 된 행운목 두 그루는 남자 친구의 직장인 잠실과, 나의 직장 강남에서 각자 터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행운목의 잎이 더 커지거나 깨알 같은 뿌리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면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내며 행운목의 변화를 알리고 또 기뻐했다.


사실 행운목보다 더 많이 변화한 건
다름 아닌 나의 남자 친구였다.

집에서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식물들도 많지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랬던 그도 이 행운목만큼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반려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지, 꽤 열심히 물도 갈아주고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변화가 어쩐지 낯설고도 신기했다.


심지어 남자 친구는 5일간의 긴 연휴기간이 시작되자 행운목을 데리고 퇴근을 하기도 했다. 본인이 돌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수경재배 중인 행운목의 물이 다 말라버릴까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긴 휴가가 끝나자 남자 친구는 다시 행운목을 데리고 출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오전, 남자 친구가 갑작스러운 비보를 카톡으로 전해왔다. 아기 행운목이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크게 부딪힌 건지, 행운목의 팔(이파리) 한쪽이 거의 부러져 달랑거린다고 했다. (남자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쪽 팔이 부서진 행운목을 목격한 당시 본인의 멘탈도 함께 부서졌다고 했다.)

제발 현실이 아니라고 해주세요


그래서 업무를 하는 오전 내내 이 부러진 팔을 완전히 떼어줘야 할지, 본드로(?) 붙여줘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떨어진 이파리가 다시 붙기는 어렵겠다 싶어 부러진 한쪽 팔을 마저 제거해줬다고 한다.

결국 남자 친구의 모니터 옆에서 양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고 화이팅을 외치던 행운목은 이제 남은 한 개의 팔로 남자 친구를 응원하고 있다고.


행운목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의 사무실에 둔 행운목도 우리 사무실에 거주하는 고양이의 공격을 받고 큰 데미지를 얻었다. 귀여운 이파리에 마치 담뱃불로 지진듯한 모양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다.

처음엔 병충해가 아닐지 의심했지만, 병충해라고 하기엔 고양이가 야금야금 이빨로 뜯은 자국임이 너무도 분명했고, 이로 인해 나 또한 멘탈이 바사삭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결국 나의 행운목은 사무실의 고양이를 피해 우리 집으로 피신,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고 지금까지 잘 커나가고 있다.



그들이 얻게된 영광의 상처 (좌: 남자친구 | 우: 나)



귀여웠던 우리의 행운목은 각각 외팔과 구멍투성이로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서로 더 신경 써서 키워내고 있다. 비록 키우는 과정이 남자 친구와 나 둘 다 순탄치는 않지만,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애정이 가기도 한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우리의 연애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농담입니다.)


우리의 첫 커플템, 행운목의 뿌리가 많이 내리면 흙에 잘 심어서 우리의 키보다도 더 크게 자라도록 해줘야겠다.



쑥쑥 자라렴 우리의 행운목!




매거진의 이전글 반려식물에게도 병원이 있다면 좋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