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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너는 죽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니까: 아가페와 에로스

나사로를 살린 예수와 네오를 살린 트리니티

by 김태라

“너는 죽을 수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죽는 것을 살리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사랑’에서 온다. 그런데 죽음을 초월한 그 ‘진정한 사랑’에도 종류가 있다.


어제오늘 계속 비가 온다. 올봄엔 비가 잦다. 그래서 좋다. 비를 맞고 세상이 초록으로 살아난다. 죽은 자를 살린 두 사례가 있다. 성경에서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그(나사로)가 죽은 것은 잘된 일인데,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살릴 것이고 이를 본 너희가 믿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죽은 자를 살려냈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능력(사랑)을 믿게 됐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예수가 ‘살린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나사로는 잘 살았을까?


이런 상상에서 나온 소설이 L. 안드레예프의 <라자로>이다. 소설 속에서 라자로(나사로)는 삶도 죽음도 아닌 ‘바르도(Bardo)’에 갇힌 의식 상태로 생에 기생해 있다. 바르도란 티벳 불교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 중간계’를 뜻하는 말인데, 나사로는 눈을 뜨고도 그 중간의 재색을 벗어나지 못한다. 재의 색(色). 색도 공도 아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 같은 상태다. 이는 죽음보다 못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는 일언반구도 없다. 나사로는 왜 살아나야 했는가? 그 자신이 진정 죽음에서 깨어나길 바랐는가? 나사로는 그리스도 능력 테스트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또 다른 예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는 죽은 네오를 살린다. 하위 차원에서 ‘죽었고’ 상위 차원에선 ‘잠들어’ 있는 네오에게 트리니티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죽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니까.” 봐도 봐도 전율 넘치는 장면이다. 내가 사랑하므로 너는 살아야 한다. 신도 할 수 없는 절대명령이다. 네가 죽은 현실은 부정된다. 존재(사랑)가 그것을 거부한다. 나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내 존재의 부정인데 나는 존재한다.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곧 너다. 고로 너는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가상이다. 그러니 일어나라. 명하자 네오가 일어난다.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부활해 그 자신(The One)으로 깨어난다.


The One. 유일자, 하나. 네오가 더원으로 부활한 것은 트리니티와 하나(One) 됐음을 뜻한다. 하나(영혼)에서 하나(연인)으로의 전환. 실현됨. Realization. 자각(自覺)이자 실현. ‘각(覺)’이란 무엇인가? ‘보는’ 것이다. 覺이란 한자에는 ‘보다(見)’가 있다. 깨달은 자(覺者)는 무엇을 보는가? Reality를 본다. ‘Reality를 보는’ 것이 Realization이다. 실재(Reality)를 보면(알면) 양자장에 영향을 미쳐 물리적 현실로 구현된다(Realization). 고로 깨달음은 물질계에 구현되어야 진짜다. 육체화, 형태화된 자각이 Realization이다. 또한 실현된 것만이 진짜 사랑이다.


예수와 트리니티 모두 사랑으로 죽은 자를 살렸다. 그런데 예수가 살린 나사로는 좀비가 됐고, 트리니티가 살린 네오는 더원이 됐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의 사랑이 가짜인가? 그렇지 않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절대적 사랑, 즉 신성의 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가페(Agape)이다. 예수는 만유애의 일부로서 나사로라는 ‘익명적 인간’을 살린 것이다. 예수에게 나사로는 김철수, 이영자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 사랑이 진짜여도 상대를 ‘진짜로’ 살릴 수 없다. 당사자는 죽음에서 구제됐지만 또 다른 죽음(좀비)에 빠진다. ‘스스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니티가 살린 것은 ‘자기 자신’이다. 둘은 영혼이 하나인 분리된 개체들이다. 따라서 네오는 트리니티에게 ‘구제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스스로> 깨어난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거듭날 수 있다. 나사로가 거듭나려면 예수가 아닌 <자기>가 있어야 한다. 네오와 트리니티의 관계는 예수와 나사로의 관계와 전혀 다르다. 네오는 트리니티에게 익명적 인간이 아니다. 만유애의 일부가 아니다. 네오와 트리니티의 사랑은 개별적 남녀 간의 에로스(Eros)이다. 네오에겐 트리니티라는 유일한 여자가 있고, 트리니티에겐 네오라는 유일한 남자가 있다. 단 한 사람, The One의 또 다른 의미이다.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단독자라는 것. 영혼을 공유하는 지상의 단 한 사람이라는 것.


그런데 그 사랑이 죽음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이유는 그들 각자가 ‘유일한 자기(The One)’이기 때문이다. 네오와 트리니티의 에로스가 일반적(욕망적) 그것과 다른 점은 그 에로스의 근원에 아가페가 있다는 것이다. 각자가 이미 ‘나=만유(신)’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개체화된 신성의 존재들이 남자와 여자로 만난 것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본래 하나인 실상(Reality), 즉 영적으로 합일된 존재성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Realization) 관계로서만 연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신에게는 실재만이 실현된다. 그래서 그 사랑이 절대적인 동시에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에로스>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리니티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을 능가한다. 우주적인 동시에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사랑은 영혼이 하나인 또 다른 나에 대한 사랑과 만유로서의 나에 대한 사랑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랑은 모두 절대적 사랑을 향한 도정에 있는 시도이자 착오이며,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화살 같은 것이다. 그 화살은 우주의 엑스텐에 꽂힌 뒤 그 중심에 정박해 자기 자신(The One)을 낳는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유일자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유일자를 만난다. 만나진다. 그렇게 하나(One)가 된다. 본래대로 된다(Realization).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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