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부정성을 승화시키는 두 갈래 길과 그 통합
눈부신 일요일, 6월 첫날이다. <초간단해탈법>의 핵심은 ‘그냥’이다. 나의 창작법도 ‘그냥’이다. 이를 <초단편소설법>에 적었다. 초간단해탈법과 초단편소설법은 똑같이 ‘초’로 시작해 ‘법’으로 끝나며 6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이 언어유희에서 나온 통찰이다.
인간 정신에 스며든 죽음 의식은 집단무의식과 부모로부터 비롯된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주장한 샹카라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늙어 죽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늙어 죽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정곡을 찌르는 통찰이다. 인간 의식에서 집단성, 타자성이 완전히 디프로그래밍되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 길을 찾았다. 그 ‘길 찾기’가 구도(求道)인데, 길(道)의 본성은 생명이다.
생명은 신성의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 흐름이 불완전해지면 노병사(老病死)가 일어난다. 노병사는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늙은 자, 병든 자, 죽은 자를 보고 고(苦)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문유관 이야기가 상징이더라도 의미는 다르지 않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노병사, 그중에서도 사(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죽음의 씨앗은 집단(외부)으로부터 심어진다.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속하게 되는 집단은 가족이다. 그런데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혼인과 번식의 근본 동기는 사랑이 아닌 죽음이다. 인간 번식욕의 근원은 카르마 전수에 있는데, 그 전수되는 카르마의 핵심이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자기 행동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짝을 짓고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자식에게 죽음의 업(業)을 주입한다. 이것이 대물림되는 프로그래밍의 본질이다.
붓다(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머니가 없었다. 싯다르타를 낳고 바로 생모가 죽었다. 이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에게 카르마를 전달할 핵심 줄기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음 없는 왕궁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왕궁 밖에서 죽음의 실상을 보고 그것이 고통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죽음 의식이 외부에서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천명(天命)임을 싯다르타가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자각과 함께 아들이 태어났다. 이 또한 대단히 상징적이다. 죽음을 넘는 길을 가려는 순간 죽음의 연쇄에 걸린 자신을 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향해 “라훌라(장애, 족쇄)”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족쇄를 끊고 집을 나왔다(出家).
그때 이미 그는 각자(覺者)였다. 깨달음은 출가의 순간 완성된다. 시작이 곧 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이란 또한 무엇인가? 우주(宇宙; 집 우, 집 주)이다. 우주는 비어 있는 동시에 충만한 의미이다. 생명인 도(道)는 또한 ‘의미’이기도 하다. 도인(道人)이란 그 생명의 의미를 ‘아는 자(覺者)’이다. 무슨 얘기인가? 최초의 집은 죽음으로 지어지지만, 그 죽음은 생명의 재료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주입된 죽음, 즉 ‘존재론적 부정성’이 클수록 거대한 생명(긍정)의 길이 담보된다. 그런데 그 길이 실제로 펼쳐지려면 ‘그냥’의 무의(無意) 및 무위(無爲)와 함께 명료한 의도와 착실한 행동이 따라야 한다. 집을 나오는(出家)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집을 지어야(作家)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