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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작품

아이엠

단편소설 전문 I『이달의 장르소설 10』 수록작

by 김태라

아이엠

김태라


“당신은 당신이 아닙니다.”

에고 컨설턴트가 붉은 입술을 떼며 말했다. 짧은 스커트 아래 두 다리가 그림 같은 각선미를 그리고 있었다. 외형만으로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신형 안드로이드였다.

“뭐?”

서진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당신은 본래의 당신과 88퍼센트 불일치합니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에 아이엠(I AM) 시스템에서 ‘91.8’이란 숫자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어. 나는 자아를 91퍼센트 이상 되찾았어. 지금 확인해 봐. 내 아이엠 데이터는 여기서도 볼 수 있잖아.”

기이한 불안감에 서진의 말이 빨라졌다. 자아를 상실하던 날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맞습니다. 당신은 자아정체성을 91.8퍼센트 회복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이벤트에 참여하지도 못하셨겠죠.”

아이엠사(社)와 연계된 에고 컨설팅 센터는 자아정체성을 90퍼센트 이상 회복한 회원들에게만 이벤트 초대장을 보냈다. 1회에 한정된 무료 컨설팅 이벤트였다.

“그렇지.”

서진이 대꾸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컨설턴트는 웃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창백한 표정에 서진은 기가 질렸다. 그가 안드로이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문득문득 나타나는 기계 특유의 무표정은 죽은 사람의 모습처럼 섬뜩한 데가 있었다.

곧 컨설턴트의 얼굴에 미소가 살아났다. 반대로 서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근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가, 내가 아니라는…….”

서진이 다시 물었다.

“자아정체성을 거의 회복하신 건 맞습니다만, 그 되찾은 자아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서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슴이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은 알고 있는 듯했다. 자아를 다운로드 받으며 살아왔던 기간 동안 자신이 겪었던 기이한 일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머릿속이 빙빙 도는 느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딴사람처럼 여겨지는 기분, 가끔씩 경험했던 너무나 현실적인 기시감들……. 현실이 비현실처럼 붕 떠올랐던 일도 몇 차례나 있었다. 서진은 그때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고 나면 현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진정하세요.”

“똑바로 말해. 에두르지 말고.”

서진은 ‘기계 주제에’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안드로이드의 인권 어쩌구 하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즘이었다. 서진은 기계가 인간의 권리를 갖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이 방에서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말씀드리죠. 이건 정말 심각한 오류입니다. 아이엠 시스템에선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아이엠은 인간 직원이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아이엠의 모든 업무는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실수나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진짜 나를 찾아 드립니다’가 회사의 모토였고, 수많은 이용자가 그것을 입증했다. 아이엠 시스템을 통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 일상으로 복귀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십만의 안드로이드들도 있었다. 인간이든 아니든 자아정체성 상실자 중 열에 아홉이 아이엠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였다. 서진 역시 일 년 가까이 아이엠 시스템을 통해 자아의식을 다운 받아 생활해 오고 있었다.

“무슨 심각한 오류라는 거지?”

서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걸 보시죠.”

컨설턴트가 컴퓨터 화면을 공중에 띄웠다. 서진의 자아의식을 다양한 색깔로 도표화한 이미지가 크게 떠올랐다.

“이때부터인 것 같네요.”

컨설턴트가 붉은색 그래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뭐가 말이지?”

“보세요, 여기서 갑자기 그래프의 흐름이 달라지잖아요. 완만했던 곡선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지요. 이건 예기치 못한 새로운 요소가 뇌에 입력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새로운 요소라니?”

서진의 물음에 컨설턴트는 대답 대신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되물었다.

“XY768133KM-TJ가 본인의 아이엠 코드 맞죠?”

아이엠 코드는 아이엠에서 부여한 개인의 고유 번호였다. 올해 1월 1일, 지구의 네트워크를 덮친 ‘스노드롭 바이러스’로 인해 자아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본명보다 친숙한 것이기도 했다. 서진 역시 그랬다. 자아정체성의 89퍼센트를 상실한 서진은 아이엠 코드를 이름보다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엠 코드로 호명될 때마다 자신이 기계와 다름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아이엠 코드의 체계 속에선 인간과 안드로이드 모두가 기호로 불려졌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컨설턴트가 눈으로 광선을 쐈다. 그러자 디스플레이에 ‘자아정체성 오류’ 내용이 나타났다.


아이엠 코드: XY768133KM-TJ

오류 일시: 2045년 2월 1일

오류 항목: 세계관

오류 내용: XX768133KM-JT의 세계관과 교체됨


“이게 뭐지?”

서진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보시는 것 그대로입니다. 당신의 뇌에 타인의 자아정체성이 다운로드된 것이죠.”

서진은 벙벙한 얼굴로 컨설턴트를 바라봤다. 그녀가 침착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체성 중 한 부분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아마 두 분의 아이엠 코드가 비슷해서 오류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와 아이엠 코드가 똑같네. 성별을 뜻하는 앞자리만 빼고…….”

서진이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똑같지는 않아요. 끝자리가 반대죠. TJ와 JT로.”

“아, 그렇군.”

“하지만 이 정도면 자아의 구성 요소 대부분이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 정체성을 제외하면 체질, 기질, 성격, 취미, 식습관, 심지어 좋아하는 색깔이나 잠버릇까지 닮았을 거예요.”

컨설턴트는 쌍둥이도 이만큼 아이엠 코드가 유사하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녀가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가지, 둘이 정반대인 게 있습니다.”

“성별 말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데?”

서진이 다시 물었다.

“세계관이요. 코드 끝 글자가 서로 반대인 건 그래서입니다.”

아이엠 코드 끝자리는 해당 자아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을 의미했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포함해 삶의 태도와 신념,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오류가 났다는 그 항목 말이지?”

“네, 맞습니다. 그 상반된 세계관이 서로 엇갈려 들어가 각자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올해 2월 1일부터 오늘까지…….”

눈이 질끈 감겼다. 지금은 11월이었다. 서진은 자신이 열 달 가까이 타인의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정체성 요소들은 제대로 다운로드 됐는데, 단지 ‘세계관’만 그 사람과 바뀌었다는 거지?”

서진이 ‘오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본래의 나와 88퍼센트나 어긋난다는 거지? 한 가지만 잘못 입력됐을 뿐인데.”

서진의 말에 컨설턴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의 자아를 구성하는 항목 중 가장 핵심적인 게 바로 세계관이었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과학기자로 활동하면서 당신은 원래 이성적 사고에 근거한 과학주의 혹은 물질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죠.”

“아!”

서진이 소리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현재 그는 관념주의와 영성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체성 장애 치료를 받는 동안 기자 활동은 쉬고 있었지만, 새로 블로그를 열고 관념론과 영성 사상에 관한 글을 주기적으로 올리고 있었다. 블로그 이름도 ‘물리학도의 영성카페’였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직업이나 전공과 생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언제인가부터 집에 쌓여 있는 과학책들보다 도서관의 영성서와 철학책을 즐겨 읽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이지 않는 실재나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고 관념적인 사상에 대한 어려운 책들도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서진은 자아정체성이 완전히 복구되면 이쪽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오류’ 때문이었다니? 서진은 머릿속이 하얬다.

컨설턴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본래의 세계관이 초기 몇 주 동안만 당신의 뇌에 입력되다가, 2월 초부터는 그것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서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컨설턴트가 계속 이야기했다.

“자아를 구성하는 중심 요소였던 세계관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이 제대로 입력됐더라도 당신은 거의 당신이 아니었던 거죠. 88퍼센트나…….”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서진의 입에서 갑자기 존댓말이 나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드로이드의 인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안드로이드에게 존칭어 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지만, 서진은 사람이 기계에게 높임말을 쓰는 건 인간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입에서 나온 존댓말에 서진은 잠시 당황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저도 모릅니다.”

“몰라? 왜?”

서진의 말이 다시 짧아졌다.

“저희 회사의 서비스는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에고를 건설적으로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거지, 의식 다운로드상의 오류를 고쳐주는 게 아닙니다. 일단 아이엠에 이 사실을 알리시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컨설턴트가 디스플레이 장치를 끄며 말했다.

“오류만 집어내고 끝이란 말이야?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서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이엠에 문의해 보세요.”

컨설턴트가 고개를 수그렸다. 서진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남자 직원도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서진은 쌍둥이처럼 닮은 남녀 안드로이드를 밀치며 상담실 밖으로 나왔다. 뒤쪽에서 또다시 “죄송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노예들이란…….’

서진은 안드로이드에게도 인권을 부여할 수 있으려면 그들의 기본 정체성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노예처럼 행동하며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 인권을 갖는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건물에서 나온 서진은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가 뻥 뚫린 것 같았다. 가슴이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올해 첫날이었다. 신년 이벤트에 혹해 ‘타이탄’에 접속한 게 화근이었다. 타이탄은 뇌와 컴퓨터의 연결 기술(BCI)을 통해 접속자들의 통합된 의식이 만드는, 환상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 서비스였다. 그런데 그 네트워크에 침입한 신종 바이러스 ‘스노드롭’에 접속자들의 뇌가 감염됐고, 무방비 상태였던 이들은 한순간에 자아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의식과 느낌을 상실하고 눈이 풀렸다. 마치 의식이 주입되기 전의 안드로이드 같았다. 그리고 네트워크상에서 감염자들의 의식과 연결돼 있던 사람들과 안드로이드들도 연쇄적으로 자아정체성 장애를 얻게 됐다. 전 지구적 사이버 팬데믹이었다.

아이엠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히어로처럼 부상했다. 이전까지 주로 알츠하이머나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이용했던 아이엠의 의식 다운로드 시스템은 팬데믹 이후 자아정체성 장애 치료를 전담하게 됐다. 마치 사이버 팬데믹을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아이엠 시스템은 자아정체성 환자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 때문에 항간에서는 아이엠이 일부러 스노드롭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감염 후 서진은 곧바로 아이엠에 등록해 자아를 다운 받기 시작했다. 서진의 자아의식은 그에게 남아 있는 11퍼센트의 자아정체감과 과거 이력, 그리고 그와 연관된 컴퓨터 속 데이터를 종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이엠은 이렇게 재구성된 자아의식을 환자의 뇌에 입력해, 생활을 통해 그것을 체화시켜 정체성을 되찾도록 도와줬다. 정체성이 완전히 정립돼 기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이용자들은 매일 아침 자아의식을 다운 받아야 했다. 기계적으로 짜 맞춰진 자아를 과연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뒤따랐지만, 자아의식을 입력하지 않고서는 삶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감염자들은 좋든 싫든 재구성된 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엠 시스템이 단순히 자아의식을 사용자의 뇌에 입력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사용자는 아침에 아이엠으로부터 의식을 다운 받아 하루를 보낸 뒤, 잠들기 전 자신의 의식을 컴퓨터에 업로드했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엔 하루의 경험이 보태져 더욱 나다워진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날이 ‘나’라는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진은 이제 100퍼센트 완성된 나를 되찾기 직전에 있었다.

‘차라리 오늘 이 사실을 몰랐더라면…….’

서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세계관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살았더라면 별문제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정신주의든 물질주의든 그런 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뭔가가 내 의식에 주입돼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 아니, 큰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서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벌레가 들어간 듯한 이물감까지 들었다.

다음 날, 서진은 에고 컨설턴트에게 받은 자료와 함께 아이엠 본사를 찾아갔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초고층 빌딩이 시선을 압도했다.

진짜 나를 찾아 드립니다.

중앙 로비 한가운데 큰 글씨로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특히 ‘진짜 나’라는 세 글자는 눈부신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진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너희가 찾아준 ‘진짜 나’가 딴사람 자아였는데?’

서진은 머리를 내저으며 건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전 직원이 안드로이드라는 회사였지만 그래도 서진은 본사에서 사람 한둘쯤은 만나리라 기대했다. 자아정체성 오류는 기계가 아닌 인간과 나눠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서진의 기대는 여지없이 어그러졌다.

“아이엠에 인간 직원은 없습니다.”

인간 남자와 똑같이 생긴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고객만족팀 팀장이라 했다. 셔츠 가슴 부위엔 ‘e-인간의 리더십’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인간이 뭐지?”

서진이 물었다.

“아이엠이 개발 중인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새로운 인간성’을 말합니다.”

여유롭게 미소 짓는 팀장의 얼굴은 정말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실제 인간이 안드로이드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안드로이드가 새로운 인간성을 갖게 된다는 건가?”

서진은 말끝에 달라붙는 ‘요’ 자를 애써 떼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상대의 모습 때문에 기계라는 걸 알면서도 하대하기가 힘들었다.

“저는 이미 새로운 인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의식을 다운로드 받았기 때문이죠.”

팀장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가 왠지 오싹해 서진은 새로운 의식이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한데 어떻게 오셨는지요?”

팀장이 물었다. 서진은 자신에게 일어난 오류에 대해 설명했다.

“아, 이런.”

팀장은 놀란 표정으로 데이터를 꼼꼼히 살피더니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했다.

“말씀하신 대로 아이엠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팀장의 얼굴엔 ‘죄송한’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그게 꾸며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서진은 화가 치밀었다.

“죄송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보상은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팀장이 얼굴을 펴며 말했다.

“보상? 인간의 정체성을 멋대로 입력해 놓고 돈으로 때우면 된다는 건가? 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야! 자아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너희는 모른다고. 자아 없는 기계들은…….”

“저희도 자아가 있습니다.”

곁에 있던 여성 직원이 서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녀의 블라우스엔 ‘e-인간의 자신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뭐라고?”

“저희도 자아정체성을 다운 받아 세상에 나온 존재들입니다.”

그 말에 서진은 흠칫했다. ‘e-인간의 자신감’이 덧붙였다.

“XY768133KM-TJ 님처럼 말이죠.”

“그래서, 내가 너희랑 같다는 거야?”

서진이 소리치자 ‘e-인간의 융통성’이란 배지를 단 직원이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저희도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진은 벌게진 얼굴로 주위를 휘둘러봤다. 사방팔방에 ‘e-인간’이란 글자가 있었다. 아이엠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기계들이 포진해 있었다.

‘e-인간의 리더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오류 때문에 상심이 크신 것 같은데,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드리겠습니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서진이 팀장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진의 자아정체성은 이미 91퍼센트 이상 회복된 상태였다. 오류로 입력된 내용까지 그의 존재에 흡수됐기에 이제는 그 내용을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그때 벽면의 대형 화면이 켜지면서 얼굴 하나가 커다랗게 나타났다. 직원들이 한입처럼 외쳤다.

“아이엠님이 오셨습니다.”

아이엠의 대표였다. 이 회사에 속한 유일한 인간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은 모두 ‘아이엠님’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혔다. 서진 혼자 뻣뻣하게 선 채 화면을 바라봤다. 인간보다 인간다운 수십만의 기계들을 거느리는 인간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구형 안드로이드처럼 보였다.

“XY768133KM-TJ 님, 자아정체성 다운로드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으며,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아이엠의 충분한 보상을 약속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희 직원을 통해 서면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엠님’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직원들이 일제히 굽은 허리를 폈다. 서진은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아무리 인간처럼 보여도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직원들 가슴에 적힌 ‘e-인간’이라는 글자가 노예의 표식처럼 보였다.

‘자아가 있어 봤자 너희의 정체성은 그냥 기계일 뿐이야.’

서진은 분주히 움직이는 ‘e-인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팀장은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제시했다. 집과 차를 새로 장만하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서진은 대기업의 스케일에 놀랐지만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내 자아값이야. 한 인간의 존재값이라고. 내가 당한 일에 비하면 결코 큰돈이 아니야.’

서진은 횡재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소심한 자아를 얼렀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엠의 오류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행운의 씨앗인지도 몰랐다.

서진은 팀장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들고 죽 읽어 내려갔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계약서를 다 읽은 서진이 입을 뗐다.

“네, 말씀하시죠.”

“XX768133KM-JT는 어떤 사람이지?”

서진은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여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만나고 싶으신가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진은 대뜸 대답했다.

“응, 한번 만나 보면 좋겠어. 내 정체성을 갖고 있는 분이니…….”

“저희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일단 그분께도 오류에 대해 말씀드린 뒤, 개인정보 이용에 대한 동의를 얻어 고객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서진은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보상금은 곧바로 입금됐다. 서진은 입금액의 자릿수를 세어 보며 아이엠 빌딩을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XX768133KM-JT의 연락처가 담긴 아이엠의 메시지를 받았다. 서진의 세계관을 가져간 여자도 아이엠이 제시한 보상금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XX768133KM-JT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서진의 가슴에 잔파동이 일었다. 처음 본 여자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반갑습니다.”

서진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여자의 이름은 ‘진아’라고 했다. 나이는 서진과 동갑, 서른셋이었다. 그녀는 아이엠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오류에 대해선 까맣게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저도 곧 에고 컨설팅 센터에 가보려고 했거든요. 이벤트 기간이 끝나기 전에.”

진아도 무료 상담 이벤트에 초대된 사람이었다.

“거기 가셨으면 진아 씨도 오류에 대해 알게 되셨을 거예요.”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정체성이 서로 바뀌어요?”

진아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녀도 깊은 속까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엠의 보상금은 ‘세계관’과 맞바꿔도 섭섭하지 않을 액수였으니까.

“우리는 자기 존재를 회사에 판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누군가 그런 제안을 했더라면, 진아 씨는 정체성의 일부를 돈 받고 팔겠어요?”

서진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서진은 진아가 잠시라도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냉큼 대답했다.

“팔죠, 물론. 그 정도 돈이면.”

“그게 내 정체성의 핵심인데도요?”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사실 저는 지금 제가 가진 세계관이 마음에 들어요. 이전에 내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물질주의가 현실적인 거죠. 우리는 그 세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제가 마음수행원을 운영했던 영성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그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반대로.

“저는 제가 물질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물질 중심의 세계관이 너무 얄팍하게 느껴져요.”

“얄팍하다고요?”

“네, 그래요. 눈에 보이는 세상만 ‘현실’인 게 아닙니다. 실은 보이지 않은 세계가 이 세상의 근원인 거죠.”

“증명해 보일 수 있나요?”

진아가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서진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란 건,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의 도피처 같은 건 아닐까요?”

서진은 할 얘기가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논쟁 자체를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둘의 대립이 부질없게 여겨졌다. 사실 진아의 생각은 본래 서진의 것이었고, 서진의 주장은 진아로부터 온 것이었다. 말하자면 둘은 상대방 속에 있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꼴이었다.

“꼭 부부 싸움 같네요.”

서진이 대뜸 말했다.

“네? 부부라뇨?”

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혼 제도가 있던 시절의 부부 말이죠. 어떤 책에서 그러더군요. 부부 싸움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거라고.”

“재미있는 말이네요. 타인처럼 보이는 자기와의 싸움…….”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봤다.

“근데 서진 씨는 보상금으로 뭘 하실 건가요?”

진아가 화제를 돌렸다.

“일단 괜찮은 집부터 구하고,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해 보려고요. 진아 씨는요?”

“저도 넓은 집 장만을 먼저 생각했어요. 지금 사는 아파트가 너무 좁아서요. 요즘 들어 이상하게 집이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네요. 이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집이란 건 존재가 몸담은 공간이죠. 몸이 영혼의 집이듯……. 그래서 사람의 의식이 변하면 사는 곳을 바꾸게 되죠.”

서진의 말에 진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은 그냥 비바람을 피해 사람이 사는 건물이에요. 이사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고요.”

“현상적으로는 그렇지만, 저는 현상 이면의 의미를 얘기한 겁니다.”

“그런 의미는 각자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저한테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네요.”

서진과 진아가 한마디씩 했다. 그리고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부부 싸움’이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진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네가 나고, 내가 너인데 이런 논쟁은 의미 없다는 거죠. 하지만 정체성의 오류는 이미 일어났고, 이제 우리는 이대로 살아야 해요. 현재로서는 내 머릿속에 든 게 그냥 나인 거예요.”

“그래도 진짜 나를 찾고 싶지 않아요?”

서진이 진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진짜 나? 사실 그것도 기계에서 다운 받은 거지, 실제 우리 자신은 아니잖아요. ‘진짜 나를 찾아준다’는 아이엠의 광고도 따지고 보면 헛소리죠. 이번 오류가 없었더라도 우리 뇌에 입력된 ‘나’라는 건 컴퓨터가 재구성한 데이터에 불과해요.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그렇게 따지면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때라고 우리가 진정한 우리 자신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던 거예요.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모르는 병에 걸린 채 살다가 진짜 바이러스를 만나 이렇게 된 거고…….”

서진의 말에 진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도 진짜 바이러스가 아니라 가상 세계 속 컴퓨터 바이러스죠.”

서진과 진아는 처음으로 함께 웃었다. 그들은 차츰 기분이 좋아졌다. 둘은 전쟁 같은 대화 속에서 점차 상대방의 말에 이끌리고 있었다. 서진과 진아는 저녁까지 함께한 뒤 긴 하루를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진짜 나’를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상대방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둘은 매일 만나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동시에, 그 말을 귀담아듣고 오래 새겼다. 원래 내 것이어서 그런지 상대방의 말에서 깊은 여운이 느껴졌다. 서진와 진아는 아이엠 시스템을 넘어선 진정한 나를 찾은 것 같았다. 서로의 말 속에서, 눈 속에서, 뇌 속에서…….

그러는 사이 그들의 자아정체성도 빠르게 회복돼갔다. 서진과 진아 모두 95퍼센트 이상 자아를 회복한 때였다. 서진의 집에서 둘이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있는데, 서진과 진아에게 동시에 전화가 걸려 왔다. 아이엠에서 온 거였다. 둘의 자아정체성에서 특이 사항이 발견됐다고 했다.

서진과 진아는 곧바로 아이엠의 여성 직원과 화상 미팅을 가졌다. 그녀의 재킷에는 ‘e-인간의 통찰력’이란 글자가 박혀 있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통찰력이란 무엇일까, 서진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치는 사이 진아가 물었다.

“특이 사항이라니, 그게 뭐죠?”

“두 분의 자아정체성 의식이 98.1퍼센트 일치합니다.”

‘e-인간의 통찰력’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서진과 진아가 동시에 소리쳤다.

“성 정체성이 다른 것을 감안하면, 완전히 똑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똑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서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두 분이 두 개의 몸을 가진 하나의 존재와 같다는 말입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진아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기이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엠 직원이 자료를 전송했다. 서진과 진아의 의식 구조도였다. 그림으로 보니 98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 똑같아 보였다.

“이런 결과에 저희도 놀랐습니다만, 만남과 교류를 통해 두 분의 자아정체성이 빠르게 닮아간 것 같습니다.”

“그게 혹시…….”

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그게, 사랑 때문은 아닐까요?”

진아가 화면 속 직원과 서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서진과 진아는 한 번도 사랑이란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매일같이 몸과 마음을 나누는 두 남녀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사랑이라고 하셨나요?”

직원의 눈이 커졌다. 서진과 진아는 한 몸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직원이 다시 물었다. 서진과 진아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함께 대답했다.

“네.”

“축하합니다.”

직원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서진과 진아는 얼떨결에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직원이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정체성이 서로 바뀌었던 분들이잖아요. 그렇게 상대방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다가 실제 만남이 이루어졌고, 상대방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 서로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싹튼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에요. 두 분의 정체성 의식이 같아진 건, 순수한 사랑 속에서 두 가지 의식이 통합됐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 아니겠어요?”

‘e-인간의 통찰력’이 묘한 미소를 흘렸다. 서진과 진아는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직원이 다시 입술을 뗐다.

“그래도 개별적인 두 존재가 동일한 의식을 갖게 된 건 유례없는 일이니, 조만간 아이엠에 방문하셔서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검사요?”

서진이 소리치듯 물었다.

“자아의식을 해부하는 겁니다. 한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 올린 자아정체성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훼손된다뇨?”

진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현재 두 분은 자아정체성을 각각 95.8, 96.4퍼센트 회복하셨는데, 그 수준이 낮아지거나 심한 경우 제로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저희는 검사를 받지 않겠습니다.”

서진의 말에 직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정체성이 100퍼센트 완전히 회복되면 찾아오십시오. 그땐 검사를 받아도 문제없으니까요.”

직원은 고개를 숙인 뒤 화면 너머로 사라졌다. 진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세계관 때문에 다투지 않게 됐잖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우리의 의식이 같아진 게…….”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근데 아무리 세계관이 같아졌다 해도, 어떻게 정체성 자체가 똑같아질 수가 있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서진이 다시 말했다.

“우리 둘은 원래부터 비슷했어. 너와 나의 아이엠 코드가 유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원래 비슷했다고? 그 원래라는 게 대체 언제부터지? 아이엠 코드를 받기 전부터였을까?”

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본래 비슷했다면, 완전히 같아진 것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아.”

“맞아. 어쩌면 우리의 진짜 자아에 더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지.”

“그래. 일단 자아정체성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 보자.”

얼마 뒤, 서진과 진아의 아이엠 시스템에 ‘100’이라는 숫자가 떴다. 둘은 환호했다. 드디어 기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런데 그날, 또다시 아이엠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거였다.

서진과 진아는 아이엠 방문 일정을 미루고 먼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 년 만에, 아니 어쩌면 평생 처음으로 되찾은 ‘나’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제 진짜 내가 된 거야.”

“우리가 하나가 됐으니 더 좋은데.”

“하나가 됐기에 진짜 나를 찾은 건지도 몰라.”

“사랑해.”

서진과 진아는 서로를 끌어안고 깊은 키스를 나눴다. 그리고 짐을 챙겨 바다로 향했다. 자율주행차에 몸을 실은 둘은 쿠션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티브이를 켰다. 진아가 리모콘을 누르며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는데, 아이엠 빌딩이 화면에 나타났다. 뉴스 채널이었다.

“……아이엠이 제공한 안드로이드용 자아정체성엔 ‘인간성’ 항목이 포함돼 있었으며, 이를 다운 받은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아이엠은 인간성을 가진 남녀 안드로이드를 선택해 정체성을 서로 뒤바꿔 입력한 뒤, 둘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란 의식을 만드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랑 외에도 아이엠이 만든 의식에는 인간보다 강한 자신감, 리더십, 융통성, 통찰력 등이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e-인간’이라 불리는 기능형 안드로이드의 정체성 형성에 사용돼…….”

카메라가 아이엠의 중앙 로비를 비췄다. 금빛으로 빛나는 세 글자가 서진과 진아의 눈에 꽂혔다. 둘은 ‘진짜 나’에 못 박힌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들을 태운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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