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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치 Mar 21. 2020

나는 사랑을 말하고 그는 이별을 말했다

독립의 서막이 울렸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미안해."


나쁜 사람이라는 오점을 남기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이 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는 끝까지 헤어지자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사방에 흩뿌려놓고도.

정리하는 건 내 몫이구나.

입을 열어 최대한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언제 깨질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걷던 얼음 호수의 한 복판에서 파삭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차가운 호수 아래로 깊이 침잠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이던 우리였는데.

우리 관계는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그는 소개팅으로 만난 지 두 번 만에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첫 만남에 분위기가 좋아 곧 썸이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급격한 전개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의 행동에는 어딘가 서툴면서도 동시에 능숙해 보이기도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아직은 그를 잘 모른다고, 조금은 더 겪어보고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 숨어있던 나의 조급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단정한 용모,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하지 않은 경제력, 그리고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

한 번 만나고 파악한 그의 정보는 그게 전부였지만, 결혼을 고민하는 여자에겐 놓치기 아까운 모든 것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누구나 마다하지 않을 매력적인 조건들이 '못 먹어도 고!'를 외치라고 내 마음을 부추겼고 한참을 번뇌한 끝에 결국,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리의 오늘부터 1일이 시작되었다.




그를 만난 건 직장 생활로 하사 받은 무기력함을 휘감고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연애도 제대로 안 하는 딸이 혹시라도 결혼을 못할까 하루하루 불안해하셨고 나는 유독 나에게만 어려운, 노력으로도 안 되는 연애에 지쳐있었다.

나의 머릿속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했고 여유를 머금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궁지(窮地)

우습게도 그때는 내가 궁지에 몰려있다고 생각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직장에 믿을 건 내 몸 하나뿐.

경제적인 여유도 능력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좋아질 거란 기대감만 갖고 땀 흘리는 노력 없이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 그게 나였다.


그런 나에게 그의 낯선 등장은 막다른 길 끝에 별안간 나타난 문이었다.

나는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흥분을 가득 안고 힘껏 그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면 나의 진부한 인생이 꿈과 희망이 가득한 원더랜드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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