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의 세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사 날이 다가왔다.
이전 세입자인 공부방 원장님이 이사한 날 저녁, 온 가족이 총출동해 입주청소를 시작했다. 입주청소를 맡기자고 엄마한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절약할 수 있는 돈은 아끼라는 말만 돌아왔다.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시기여서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입주청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사 당일, 아침 일찍 아빠 친구분의 용달차를 빌려 내 방 한 칸을 채우던 소박한 짐을 싣고 이사를 시작했다.
남동생과 아빠의 활약으로 짐은 차곡차곡 거실에 올려졌고 책상 앞에 앉아 편안한 일만 해왔던 나는 몸으로 하는 일에는 걸리적거리는 존재였다. 눈치껏 어지럽지 않은 일을 하고 소소한 심부름을 하며 나의 몫을 했다.
모든 짐을 옮겨놓고 아빠와 동생은 일을 하러 떠나갔다.
그렇게 이사 첫날부터 나는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이사한 동네는 한참 개발 중인 신도시인 데다 입주를 하는 중이거나 입주를 앞두고 있는 아파트에 둘러 싸여 거리는 유령도시처럼 한산했다.
동네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던 터라 본격적으로 시장조사도 할 겸 한 바퀴 둘러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2차선의 조그만 길을 건너 옆 단지를 거닐 때였다.
어느 베란다에 어디서 많이 본 현수막이 펄럭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 저 현수막은... 우리 집 공부방에 붙어있던 현수막인데!'
그랬다. 내가 이사 오기 전 살고 계시던 공부방 선생님이 바로 옆 단지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디로 이사 가는지는 끝끝내 이야기하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길 한복판에서 마주칠 줄이야.
그 순간, 학생들 부모님께 나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말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원장님께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학생들을 소개해준다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원장님이 했던 말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집을 둘러보고 계약할 때 본인은 여기서 멀리 이사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여기로 이사 오시면 아이들도 많아서 공부방도 잘되고 앞으로 너무 좋을 거예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바로 옆 단지로 이사 갈 거라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애초에 가르치던 아이들과 함께 이동할 생각이었을 텐데 도대체 나에겐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서 했을까? 그게 가장 화가 났다. 이렇게 금방 탄로 날 거짓말로 내 뒤통수를 친 것만 같아서.
같은 일을 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나를 경계한 걸까?
아마 어떻게든 빨리 계약을 성사시켜 본인의 이사 날짜를 용이하게 맞추고자 하는 사심이 가장 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이득을 위해 교묘하게 나를 구워삶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아 화가 났다.
아니, 사실은 순진하게 보이는 그대로 사람을 믿은 어리숙한 내 모습이 나약해 보여 화가 났다.
낯선 이에게 향하는 분노는 사실은 나를 향한 분노였다.
내가 그동안 온실 속의 화초처럼 너무 곱게 자라왔다는 것을 절감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