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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림 Oct 21. 2024

이방인이 되는 날

대구의 방을 정리했다.

갑작스레 정해진 미국행은 대학 생활 끝자락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 원래라면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업 준비를 해 경력을 쌓고자 했다. 난들 알았을까 해외여행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내가 미국에서 살게 될 줄이야.


   짐을 정리하고 이불만 깔아 둔 나의 방, 1년 동안 함께 한 방바닥에서 와플을 먹었다. 나의 마지막 식사는 엄마와의 돈가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졸업도 전에 허둥지둥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간은 바람처럼, 이미 눈을 떴을 땐 출국 날짜였고 쉽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예상치 못한 미국인과의 스몰톡이 시작되었다. 원어민과 나눠보는 대화는 처음이라 너무 긴장해 버린 탓에 딱딱하게 짧은 대답만 하고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못했다. 내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내가 튀어나오는 마법 같은 일은 없었다. 16시간 비행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사육이 이런 것인가 라는 보잘것없는 생각을 하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노트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작업들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미국에 도착했고 온전히 기억나는 것은 내 몸 만한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인터넷으로 봐두었던 집주인과의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분주했던 것뿐이다. 한국과는 다른 치안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항에서 내려 우버를 타고 이동하기 전까지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고슴도치처럼, 혹여 누군가가 짐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을까 싶어 경계했다. 짐이 많았기 때문에 쓰러져 가는 이민가방을 허둥지둥 챙기는 내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을지도.


   비행기에서 내려 첫걸음을 한 순간부터 걸어 다니는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뒤뚱뒤뚱 짐을 싣고 영어로 잔뜩 쓰인 표지판을 수없이 지나쳐 갔다. 한국에서 제주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야자수, 꼬불꼬불한 고속도로, 초록색이 아닌 파란색 표지판.


   우버의 편리함으로 빠르게 도착한 임시 숙소의 문을 열었을 땐 절망에 빠졌다. 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합 60kg에 임박하는 짐들을 들고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이미 체력은 동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올라가다가 분명 계단에 어마어마한 흠집을 낼 것이 분명했다. 집주인과의 약속 시간이 빠듯해서 일단 문 앞에 짐을 놔두고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방은 괜찮았고 빠르게 계약을 끝내고 임시숙소에 있는 짐을 가져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짐을 들고 갈 걸이라는 아쉬운 생각을 했다.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4일이나 예약을 해둔 나의 임시숙소는 의미가 없어졌다. 어쩔 수 없었기에 빨리 잊어버리고 짐을 풀었다. 어느 정도 짐을 풀고 나서 집주인이 사 준 짬뽕을 먹었다. 비행기에서 먹은 음식들이 여전히 소화되지 않아 많이 먹을 수 없었지만 낯선 땅에 도착해 처음 먹는 음식은 타인의 정이였다. 얼떨결에 장도 야무지게 보고 돌아왔다.

낯선 공간에서 길었던 하루를 뜨거운 물로 씻어냈다.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대충 말려 머리 끝부분이 축축했다. 더 말릴 엄두는 나지 않고 그냥 눕고 싶었기에 축축한 머리가 베개에 최대한 닿지 않게끔 어정쩡하게 베개 모퉁이에 머리를 눕혔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베개를 위한 일말의 양심이었달까. 두 다리를 쭉 피고 길었던 하루를 되새김질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해 저녁이 될 때까지 하루가 꽈배기처럼 끝없이 연결된 느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도 잠시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방 잠에 들었다. 방에 불은 끄고 잤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을 떠나 이방인이 되는 첫날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앞으로 연고 없는 이 땅에서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까만 잠 속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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