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을 돌아다니면서 좋았던 점은 맨하탄의 면적이 서울에 있는 '구'단위를 두어개 붙여놓은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핫한 음식점과 쇼핑몰들을 한번에 경험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유행에 민감한 힙스터들이 모이는 도시답게 기업형 커피숍이 아니더라도 참신하고 멋진 개인 커피숍들이 많았다. 스텀프타운이라던지, 이텔리젠시아라던지 하는 유명 로스터리 카페는 아니었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커피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보이는 샵들이었다.
홍대에서 2년 넘게 디저트카페를 운영했던 나로서는 소자본의 개인 창업주들의 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못든 것을 걸어 불황속의 창업이라는 모험에 뛰어든 그 젊은이들을 응원해주고싶었다.
여행을 오기 전에 샀던 여행책자에서 가볼만한 몇군데의 개인 커피전문점을 체크해두기도 했고 걷다가 이따금씩 우연히 마주치는 곳을 기웃기웃 거리며 기업이 운영하거나 체인점 형태의 매장이 아닌 개인 커피숍이라 판단 됐을 때에는 얼른 매장으로 뛰어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잔에 몸을 녹였다.
가장먼저 기억나는 곳은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verb라는 커피숍이다. 윌리엄스버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렀던 곳이기도 했고, 다른 커피숍들과 조금은 다른 verb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인상깊었기때문에.
확실히 윌리엄스버그의 분위기는 맨하튼과는 달랐다. 맨하튼이 조금 더 정리된, 그러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함께 숨쉬고 있는 도시였다면 윌리엄스버그는 자유분방한, 틀에 짜여져있지 않은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서울로치자면 홍대나 망원동, 연남동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Verb의 내부는 어두침침했다. 스텀프타운이나 블루바틀, 혹은 맨해튼에 있는 커피숍들이 밝고 세련된 느낌이라면 이곳은 외관도, 내부에 있는 테이블이나 의자도 '낡았다'는 인식을 줄만큼 오래되고, 두서없이 놓여 있어서 부산스러운 느낌이었다. verb의 매력은 그 부산스러움에 있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러 갈때나, 커피를 마시며 쉬고싶을때 과하게 정돈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곳을 가면 오히려 불편감을 느낀다. 그래서 고깃집을 찾을때도 오래된, 환풍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도 벽에 낙서가 가득하고 낡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정감가는 곳을 더 찾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으로 개성이 넘치고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두꺼운 책을 펴고 앉아서 공부를 하는 학생, 베이글을 뜯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동네 아저씨, 시종일관 다리를 덜덜 떨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까만 뿔테의 청년, 그리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내부를 찍으며 두리번 거리는 동양의 한 여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던 아저씨까지.
커피를 마시는 재미 외에도 주변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 바로 Verb였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재미난 영감이 떠올라서 수첩에 끄적여볼 양으로 아예 자리를 틀고 앉았다. 여행책이며 카메라며 가방이며 짐이 많았던 나는 작은 테이블에 딸린 두개의 의자를 다 채우고도 모자라 테이블 위에도 수첩과 카메라를 올려놓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끄적이고 있었는데 그때 한 아저씨가 다가왔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아가씨, 이 카메라 이거 정말 위험하게 놓여있는거 알아? 그러다가 내가 툭 치고 지나가면 바닥으로 슉! 하고 떨어져버린다고!"
그는 과장된 몸짓과 의성어들을 섞어가며 말했다. 떨궜을때 내가 느낄 공포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것이었겠지.
"아, 네네.. 안쪽으로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나도 쌩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소 행색이 홈리스 (미국, 캐나다에서는 길에서도, 패스트푸드점에서도, 공원에서도 어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집이 없는 사람들..) 처럼 궁색해보여서 그가 내게 점점 다가올때 내 물건들을 훔쳐가려는 것이 아닌지 긴장했지만 오히려 물건 간수를 잘 하라고 해주는 말을 듣고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더러는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저씨의 과장된 몸짓과 설명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Verb라는 곳은 이 모든게 어색하지 않게, 생소하지 않게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관광객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이 신기하지 않을 법도 한데 그 당시는 맨하탄에 비해서 윌리엄스버그가 상대적으로 작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큰 카메라를 들고 혼자 앉아있는 나를 신기하게 흘끔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눈길을 받는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기도 했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낙서를 끄적이고, 사진을 정리하고 윌리엄스버그에 대한, verb에 대한 느낌을 수첩에 남기고 그곳을 나왔다. 아쉬운 마음이 못내 있었지만 아직 내게는 방문해야 할 보석같은 커피숍들이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가 다시 꼭 올 날이 있을 거라 믿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맨하탄으로 나와서 정처없이 걷다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어디론가 몸을 녹일 곳이 필요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록 샵의 로고가 내게 익숙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08년의 뉴욕 방문에서 보았던, 첼시 마켓안에서 보았던 그 멋스러운 커피숍 ninth street espresso였다.
여러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자본의 창업주가 아닌지, 아니면 그랬던 그곳이 이렇게 번창 한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외관의 소박한 모습에 마음이 끌려 일단은 들어가보기로 했다. 게다가 2008년에 미처 많이 경험하지 못했던 아쉬움도 해결하고싶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용하고 차분해보이는 바리스타분이 옅은 미소와 함께 나를 맞아주었고 매장 안은 그의 모습과 어울리게도 매우 조용했다.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이거나 동네 주민으로 보였고, 나 같은 이방인은 한명도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책을 펴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이곳은 물론 사용하고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도 라마르조꼬로 최상급이었고, 판매하는 커피 종류도 에스프레소와 에스프레소에 우유만을 가미한 음료, 그리고 브루드 커피로 한정된 '커피'메뉴에만 집중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얼마나 커피맛에 신경을 쓰는지도 알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가장 좋아하는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서 나인스트릿에스프레소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몸을 녹이며 맨하탄의 또다른 부분인 조용한 이스트빌리지를 음미했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고, 나인스트릿의 내부는 바리스타의 미소처럼 조용하고 아늑했다. 첼시마켓에 있는 지점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나도 조용한 그 속에 섞여서 여행 일정을 다시 정리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어보았다. 앞으로 방문해야할 커피숍들은 또 내게 어떤 영감과 감동을 줄 것인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