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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양 Oct 04. 2024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34살,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 눈을 감고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눈에 의지해 살아가던 나는 어느 날 문득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시각장애인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들처럼 살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단 몇 시간이었지만 눈을 감고 집에서 생활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순간은 내게 작은 모험이자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익숙했던 내 집이 낯설어졌다. 발끝에 닿는 바닥의 질감부터, 손끝으로 더듬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물건들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어색했다. 벽을 더듬어 방향을 잡으려는 순간, 냉장고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예상치 못한 충돌에 살짝 아찔했지만, 아픔보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늘 안전하다고 믿었던 집이 갑자기 커다란 미지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음료수를 꺼내 마시려다가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음료수는 내 옷 위로 흘러내렸고, 나는 당황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일이 눈을 뜬 상태였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몰려왔다. 일상에서 내가 얼마나 시각에 의존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문을 열고 닫는 것, 물건을 집는 것, 걸어가는 것조차 눈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이 사소한 도전들을 너무 가볍게 여겼음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내 안의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사물의 미세한 질감,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변화, 공기 중의 냄새까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눈에 의지하지 않으니 다른 감각들이 자연스레 예민해졌다. 머릿속에서만 그려지던 집 안의 모습이 마치 손끝으로 새롭게 그려지는 듯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경험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은 단순히 시각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눈을 감고도 더 섬세하게 세상을 느끼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 그들이 마주하는 세상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느끼는 세상의 깊이와 넓이를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는 종종 시각장애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불편하시겠어요," "어떻게 생활하시나요?" 같은 질문들 속에는 그들을 약자로 보는 선입견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덜 완전하다는 생각, 우리보다 더 불편한 삶을 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세계는 단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눈을 감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해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은 우리보다 더 깊이 세상을 이해한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느끼고,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그 누구보다도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동정이 아닌 진정한 이해와 존중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경험한 이 짧은 시간은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각장애인들은 단지 시각이라는 감각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얻은 사람들이다. 이제 나는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으려 한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시선은 눈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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