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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양 Oct 07. 2024

봄은 충분히 기다렸을 때, 오는 게 봄이야



신림동 옥탑방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다. 추웠다, 겨울이면 한기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고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그랬다. 우리도 그랬다. 방 한켠에 놓인 낡은 스피커와 음악 장비들이 그 공간의 전부였고, 꿈이라는 건 어쩌면 그곳에 아주 작게나마 깃들어 있었다.



기타를 치는 사람도 없고,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앞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노래라는 건 그저 핑계였다. 잠시라도 그 추위를 잊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음악으로 만들었다. 불완전해도 좋았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겨울이면 이불을 세 겹씩 덮어도 발끝이 시렸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신문지를 겹겹이 덧대고, 그 앞에 둘러앉아 입김을 불어가며 웃었다. 난방비를 아낀다고 히터를 거의 켜지 않았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이 시려 오면 손을 털며 일어나곤 했다. 그게 일상이었다.



커피 믹스 두 개로 세 명이 나눠 마시는 일도 어색하지 않았다. 친구 한 명이 뜨거운 물을 받아 오면, 그 자리에서 커피를 타서 조심스레 건넸다. 단맛이 입안에 퍼질 때마다 다들 묘하게 웃었다. 쓴맛도 달게 느껴지는 건 그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컵 속에 얼마나 많은 우리가 담겨 있었을까.



그때 내 21살 생일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놓고 생일을 축하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고, 조금 비싼 짜장면을 시켰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축하였다. 그게 얼마나 값졌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짜장면 한 젓가락에 웃고, 소주 한 잔에 속내를 나누던 그 밤.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런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나는 종종 옥탑방을 바라보곤 한다. 그때는 그 방이 나를 가두고, 내 꿈을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곳은 오히려 우리를 지켜주던 작은 성곽이었다. 겨울의 냉기가 우리를 얼어붙게 할 때도, 나는 그 방 안에서 작은 희망을 꺼내 들었다. 커피의 단맛처럼 잠시 스쳐 가는 것이었을지라도, 희망은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아버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집안이 어려웠던 그 시절, 아버지는 낡은 차에 옷을 걸고 길거리를 다니셨다. 새벽이면 차에 옷을 실어 나르며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그 모습이 내게 남긴 건 서러움만이 아니었다. 겨울 바람에 흔들리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배운 것은 버티는 법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나서는 아버지의 걸음에서, 나는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았다.



그때는 버티는 것이 고통이었다. 하루하루가 끝나지 않는 추위처럼 느껴졌고, 내일이란 게 과연 올까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버팀 속에서 작은 희망들이 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커피 한 잔의 단맛에 담긴 위로, 짜장면 한 그릇의 온기, 그리고 그날의 대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추위가 찾아올 것이다. 삶이 나를 다시 흔들고, 넘어뜨리려 할 때가 오겠지. 그럴 때마다 나는 옥탑방의 그 겨울을 떠올릴 것이다. 그 방에서 나는 무엇을 가졌던가? 손에 쥔 건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봄이 오는 건 결국 기다렸기 때문이다. 추운 날들이 있었기에, 그날의 따뜻함이 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견뎌내고 있는 당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당신에게도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 봄이 오면, 당신의 아픔과 추위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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