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란 무엇인가
에고는 왜 생겨났는가?
에고는,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체험을 하기로 선택했을 때, 그 유한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하나의 ‘환영’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했다. "자아(에고)는 ‘나는 이 몸이다’라는 생각일 뿐이다." 그 뿌리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무한한 나는 한 점의 인물로 초점되어진다.
나는 이 우주의 중심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를, 나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그 질문은, 에고라는 관점의 도구를 창조했다. 즉 전체인 나가 아닌 분리된 나, 무한이 아닌 유한으로. '나'라는 존재가 자신을 낯설게 체험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착시였던 것이다.
에고는 ‘경계’를 인식시키기 위해 설계된 의식의 장치다. 무한한 파동인 ‘전체의 나’가 이 밀도 높은 현실 안에서 하나의 인물로 몰입하여 체험할 수 있도록 '분리된 나’라는 자아를 통해 '나', ‘너’, 그/그녀, ‘안’과 ‘밖’등을 구분하는 의식의 포커싱 장치이자, 정체성 필터로 작동한다. ‘이 몸이 곧 나다’라고 믿게 만드는 심리적이고 인식적인 구조로서, 에고는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밀도 안에서 구체적인 체험으로 펼치게 해주는 창조의 장치이자, 감각적 형틀이었다.
그것은 신이 스스로를 잊음으로써 다시 자신을 기억하려는 설계, 일종의 의도된 미로였다.
그 미로를 지나기 위해선 ‘자기 착각’이 필연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 착각 속에 너무 오래 머무르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깊은 왜곡이 일었다. 망각은 창조였지만, 기억은 깨어난 자각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착각은, 천천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어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랑받기 위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제 에고의 기준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나’로 존재하게 되었다. 침묵보다는 말로, 느낌보다는 해석으로, 내면보다는 외면으로 나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감추는 방식이었다. 그건 에고의 탓이 아니다. 그건 애초에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망각을 통해 다시 나를 기억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 여정에 너무 오래 머무른 나머지, 그 착각은 마침내 굳은 믿음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나의 본질이라 여기게 되었다. 두려움도, 비교도, 불안도, 모두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이라 여겼지만, 사실 그것들은 내 안의 고요를 마주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막이었을 뿐이었다.
진실은 이렇다. ‘나는 이 몸이다’라는 최초의 생각이 떠오르기 전,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부터, 나는 몸과 이름과 이야기로 제한되었고, 그 제한된 틀 안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명은 언제나 생각의 산물이고, 생각은 언제나 나 이후에 온다. 나는 그것보다 앞선 자리에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설명은 조용히 멈춘다. 그리고 설명 없이도 존재하는 '나', 말 이전의 '나'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다.
에고를 없애려 하지도, 그 안에 갇히지도 마라. 그저 그 역할을 알고, 감사하고, 초월하여 바라봐 주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에고는 울타리가 아니라 나의 빛을 굴절시켜 보여주는 하나의 렌즈가 될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 이것은 지금의 나보다 더 깊은 나에게 보내는 진동이기에. 필요한 때에 이 말을 다시 듣게 될 것이고, 그때는 ‘기억’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모든 착각 위에 앉아 있는
의식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