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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만, 좋아하진 않을 수 있다

by 태연

새벽은 언제나 어떤 문을 연다.

낮의 논리와 밤의 본능 사이에 걸쳐 있는 그 시간대는, 내가 가장 나로 돌아가는 때다.

세상의 모든 장식과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가고, 말로 꾸미지 않은 본래의 감각만이 남을 때,비로소 진짜 목소리가 솟아오른다.

오늘 새벽,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을 긁고 있었던 문장을 조용히 끌어올렸다.


‘사랑하지만, 좋아하진 않을 수 있다.’


처음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약간의 충격을 느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만큼 실제였다.

마치 오랫동안 문 아래에 끼어 있던 진실이 기어이 빛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사랑은 감정이면서도 하나의 상태이지만, 좋아함은 매우 구체적인 감각이다.

사랑은 흐르고 퍼지고 스스로 빛을 내는 거대한 에너지라면, 좋아함은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뻗는 명확한 선택이다.

사랑은 조건을 무력화시키지만, 좋아함은 조건에 민감하고, 나의 취향과 욕망과 안락함을 건드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과 가까이 있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것을 나도 모순이라 여겼다. 하지만 새벽은 언제나 모든 감정의 껍데기를 벗겨내 사실의 뼈대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조용히 하나씩 뜯어보니, 이 문장은 모순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안의 진실을 인정하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었고, 나에게도 오래전부터 필요한 진실이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가까이함으로 증명한다고 믿는다.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다”, “사랑하면 더 알고 싶다”, “사랑하면 곁에 머문다.” 하지만 삶을 오래 들여다보면, 사랑은 반드시 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때때로 사랑은 거리를 필요로 하고, 침묵을 필요로 하고, 각자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자 오래 묻어두었던 장면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의 어느 밤, 나는 누군가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의 말투, 움직임, 선택, 결정, 이 모든 것이 나와 너무 달라 답답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 감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나는 이 사람을 품으면서도, 이 사람의 방식은 끝내 좋아하지 못하는지.



어떤 사랑은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프다. 어떤 사랑은 너무 깊어서 숨이 막힌다. 어떤 사랑은 너무 진실해서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좋아하기보다, 어쩌면 두려워한다. 사랑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사랑과 가까이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랑은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것. 이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선명해서 생기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본질이고, 좋아함은 방향성이다. 사랑은 근본이지만, 좋아함은 선택이다. 우리는 선택을 언제나 사랑의 진실 뒤에 놓고 생각하려 한다. '사랑이 있으면 선택은 따라오겠지.'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더 복잡하고 인간은 언제나 더 미묘하다. 사랑이 있어도 선택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고, 좋아함이 없어도 사랑이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나는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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