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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그래 Oct 10. 2020

Ep.2 신경 좀 꺼주실래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니 제발 신경 좀 꺼줬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역시나 내 인생은 항상 순탄치 않구나 싶다. 무슨 청춘드라마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렇게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야 하는 것인가.

퇴사 후 어이없어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헛웃음이 나오지만, 눈물이 나오는 것보다는 낫겠지. 멘탈이 강철이 됐나 보다. 아니면 드디어 멘탈이 나가버린 것이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취업했다고 작은 아빠한테 떵떵거리지나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몇 개월 전, 작은 아빠와 두 번째 술자리를 가졌다.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지만, 첫 번째 술자리를 가졌던 지난 기억이 무려 1년 전이었다.


호주 워홀과 유럽 여행으로 근 1년을 보내고 돌아와 그만큼 동기들보다 늦게 졸업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던 때였다. 졸업 후 상반기 공채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었다.


작은 아빠와의 첫 번째 술자리는 성인 되고 거의 처음인 듯싶었기에 그간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별다른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미리 인정하고 말하는 거지만 친가 친척들에게는 묘한 피해의식이 내 무의식 중 어느 기저에 깔려있다. 그래서 무시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고, 그런 이유로 내가 그동안 이러이러하게 나름 대단하게 살아왔다는 걸 참 열심히도 어필했던 시간이었다.


1년 전, 작은 아빠와의 첫 번째 술자리가 끝나고 다행히도 그 어필은 통한 듯했지만, 중요한 건 현실이었다. 그 해 상반기는 원하는 대로 취업이 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취업 준비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깔끔하게 빠른 포기를 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한 5개월 동안 원하는 직무와는 조금 다른 일을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술자리를 가지기 전, 그 사이 시기에 한 번 더 자리를 가질 기회가 있었으나 굳이 시간을 내진 않았다.


그렇게 1년이 더 지나 만난 날, 나는 첫 번째 회사를 퇴사 후 그 당시로서는 다행히도 얼마 전에 나오게 된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누가 들어도 알만한 안정적인 직장에서 한평생을 다니신 분이라 그런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알바마냥 말하는 게 듣기에 거북했다. 형에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전달을 잘 못 받은 건지, 아니면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건지 혹은 두 개가 섞인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그래서 대놓고 내 월급을 말해줬다. 이만큼 받는다. 그러니 내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는 소리 없는 외침도 함께. 사실 정규직을 약속받고 들어간 첫 직장 치고 나쁜 금액은 아니었다. 복지 따위는 없었지만, 기본급만 봤을 때는 사회초년생 기준으로 중견기업급으로 받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다. 사실 더 놀란 것은 옆에 있던 형이었던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이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으니까. 굳이 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 그렇게까지 한 것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니 제발 신경 좀 꺼줬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허세란 허세는 다 부리고 나왔다. 사실 허세라기보단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친척들만 만나면 내 몸 안에 끓어 넘치는 피해의식이 나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알고 있는데 애써 모르는 척하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장남인 우리 아빠를 제외한 모든 친가 친척들(고모 두 분과 작은 아빠 두 분)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번듯하게 잘 살았다. ‘어쩔 수 없이’라는 가슴 아픈 수식어로 우리 아빠의 환경을 말해보자면 장남인 아빠는 진도라는 시골에서 홀로 남은 할머니를 지켰고, 농사를 작게 지으며 농협에 다니셨다.


그냥 농협만 쭉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농협을 나온 뒤, 조합장 출마를 했다. 그때, 내 나이 방년 4세. 이 부분을 보면 우리 아빠도 별 대책 없이 가정의 안정보다는 자신의 꿈을 먼저 좇던 사람인 걸 알 수 있다.  


4년의 임기 기간인 조합장 선거에서 우리 아빠는 약 13년간 네 번에 걸친 선거에서 단 한 번 당선이 되었으며 선거 활동을 하느라 오히려 빚만 늘어갔다. 그렇게 우리 집은 갈수록 가난해져 갔다. 나는 가난과 함께 그런 울분 속에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보내왔다.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는 어렸을 때 공부를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공부가 하고 싶어 울고불고하며 할머니, 할아버지께 애원했지만, 집에서 안 시켜줬다고 한다. 그래서 참고로 아빠는 중졸이었다. 그리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며 공부시켜 대학에 보냈다고 한다. 그 가방끈을 평생 부끄러워하신 듯했다. 물론, 나중에 딱 한 번 조합장을 하실 당시 대학교 졸업장까지 취득하긴 하셨지만.


겨우 이런 걸로 친가 친척들을 미워한다는 건 아니다. 미워하지도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 달가운 이유도 없을 뿐이다.


어쨌거나 당연하게도 사촌 형들, 동생들도 서울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내 기준에선.

공교롭게도 하필 그중에서 지금까지 말한 작은 아빠의 첫째 딸, 촌수로 치면 내 사촌 여동생이 나와 나이가 같다. 친척이니 나이가 같아도 몇 달 더 일찍 태어난 내가 오빠 취급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동갑이다. 그 사촌 동생은 중학교 때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약 2년간 다녀왔고, 대학교는 예체능 분야로 갔다.


나는 스물다섯이 돼서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코 묻은 돈으로 비행기를 처음 타봤고, 우리 가족 중 손재주가 가장 뛰어나 학창 시절부터 미술 선생님들로부터 화가 소리를 듣던 큰 누나는 예고-미대가 아닌 일반 인문계-인문대 수순을 밟았다. 왜? 지원을 못 해주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설움이 내 자아에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나중에 친가 친척들이 이런 내 글을 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뭐 사실 그런 것들은 중요치도 않다. 그런 게 두려웠으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입장에 따른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이건 내 글이니까. 그저 내 시각에서 풀어낸 것일 뿐이다. 오히려 담백하게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씸하다고 느끼면 별수 없지, 난 그냥 괘씸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


괘씸하다면 다른 의미에서 괘씸한 마음도 가지고 있긴 하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는 도움받은 게 없으니 나중에도 나를 도왔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색 같은 건 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나는 원래 이런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왔는데 ‘크더니 변했네’하는 그런 소리도 듣기 싫어 미리 써두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술자리를 가진 날, 충분히 취직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이 이상하게도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면 안 되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에 취업해서 돈 좀 번다며 떵떵거리며 나온 것과 지금의 내 모습이 다시 대조되며 슬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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