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오게 된 후, 한 이주쯤 흘렀을 때 3년 사귄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우리의 20대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첫 만남이 생각난다. 음료에 관심이 많아 학교 차(茶) 동아리에 들어갔었다. 동아리에 들어간 첫날, 참 예뻤던 너에게 반해 열심히 꼬시기 시작했다.
학기 중에 항상 최소 두 개에서 많게는 네 개까지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었는데도 짬짬이 연락을 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도 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만나는 동안은 피곤하지 않았다.
학교 기숙사와 내 자취방의 거리가 걸어서 무려 25분이었다. 학교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 방향으로 끝과 끝이었다. 사귀기 전, 풀이 없다는 너의 말에 풀 하나를 들고 빌려주겠다고 25분을 걸어 기숙사를 갔다. 물론 풀이 없는 채로 갔다. 나도 풀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숙사에 사는 같은 과 가장 친한 형에게 풀을 빌려서 빌려주었다. 이미 형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출발한 상태였다. 빌려주는 건데 새 걸 사서 주기엔 너무 허술하니 말이다.
그렇게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더 보면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반대로 그렇게까지 안 하면 따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했다.
그렇게 풀을 빌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달밤에 왕복 한 시간 거리를 그렇게 걷기도 했다.
아직 많은 삶을 살지도, 그리 많은 연애를 해보지도 못했지만 내 연애사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때였던 듯하다.
이 사실을 사귄 지 1년이 지나고 알게 된 너는 깜짝 놀라 펑펑 울었다. 전화상이었지만 펑펑 울던 네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는 기쁨의 눈물이었으나, 마음에 상처를 줘 울게 한 적도 많았다.
가수 자우림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만났다. 그리고 9월부터 9월까지 달력이 총 세 번이 바뀌는 동안 3년이란 시간을 함께했다. 남들처럼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를 반복하면서 덕분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됐고, 시간이 지나 널 만나기 전보다 꽤 괜찮은 사람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인해 우린 서로가 지쳐 우리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대략 두세 달 전부터는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준비기간이 있어서일까, 헤어지고 나서 생각보다 덤덤하면 어떡하지? 라는 참 쓸데없는 걱정도 했다. 물론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눈물이 정말로 없기 때문이다. 슬프다고 모두 우는 것은 아니나 슬퍼도 눈물이 정말 안 난다. 그런데 다행히도 눈물이 났다. 아니 꽤 펑펑 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다. 벌써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글을 쓸 정도로 괜찮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가끔씩 감정을 훅 치고 올 것들이 아직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눈물이 났던 것도 헤어졌다는 사실보다는 무려 연초에 네가 카톡 공지로 남겨뒀던,
-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손 씻기 전에 눈 만지지 말기. 와 같은 별것 아닌 것에 감정이 올라왔던 걸 보면 말이다.
이런 일상에 녹아내린 사소한 것들이 한동안은 앞으로도 날 먹먹하게 만들 것을 잘 알고 있다.
함께했던 시간만큼 아직도 곳곳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언제 또 생각지 못한 것이 날 울컥하게 할 진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괜찮다.
난 사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기분이 싫어 누군가와 관계 맺는 걸 한동안 꺼리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깊이 좋아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참 가난한 사랑을 주었다. 헤어지고 나니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난다.
사실 이별이 다가옴을 서로 느끼는 약 두세 달간의 과정에서도 잘해주지 못해 선뜻 헤어지지 못한 것도 있다.
라면을 더 꼬들하게 끓여주지 못한 것부터 비싸고 좋은,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사주지 못한 것들까지.
꽃 한 송이라도 더 많이 사줄 걸 그랬다.
조금 더 잘해주고 조금 더 풍족하게 해 줬다면 덜 미안하지 않을까 싶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저 미안해서 그렇다.
다 지나고 나서 하는 후회라기보다 내 자체가 이 정도밖에 못 해주는 사람이라 그렇다.
가난한 사랑만 해줘서 너무 미안하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그저 미안하다.
지금은 덤덤해서 별생각은 없다. 마지막에 서로 했던 말처럼 그냥 항상 잘 지냈으면 한다.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