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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Oct 01. 2024

[소설] 담장 위 하얀 찔레꽃 15화

15화 너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

 “야, 신재영. 네가 뭔데 튕기냐? 천하의 주현이 너 좋다고 하면 네, 하고 달려가는 게 옳지!”

진성우가 주현을 어디에다 떼어놓고 와서는 재영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말하는 거야?”

“네 놈이 그런 식으로 마음을 줄 듯 말 듯하니까 주현이 너한테 말리는 거잖아. 너 같은 새끼는 며칠 만나보면 바로 별 볼 일 없다는 거 금방 알 텐데. 네가 자꾸 거리를 두니까... 주현이 좋다고 할 때 만나. 내 장담한다. 너는 딱 사흘, 길어야 일주일이야. 알지 명품과 짝퉁. 명품과 짝퉁은 어떻게 구별한다? 가까이 봐야 한다 이거야. 너 같은 짝퉁 새끼들은 금방 티 난다고.”

“말이 좀 심하다. 진성우. 그러다가 내가 주현이랑 사귀게 되면 너는 아예 기회가 없는 거 아닌가?”

“백만분의 1의 확률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할 수 없지. 그게 주현에 대한 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이 자식아.”

“싫어.”

“와, 이 새끼, 말로 안 되네. 왜 싫은데?”

비속어를 섞는 성우의 말투에 반감이 생기지 않는 자신을 놀라워한다. 성우의 깔끔한 옷차림과 자신감 있는 표정, 그리고 총명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그가 하는 욕설은 그의 완벽함을 상쇄시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완벽한 정장 차림에 운동화가 더 감각 있어 보이는 것처럼. 게다가 진성우의 비속어 사용은 친밀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어쩌면 재영은 그의 비속어 사용으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네 말대로 될까 봐 싫어.”

“뭐?”

“멀리에서 보면 그럴싸해 보이는데 막상 만나면 아무것도 아닐까 봐 겁나. 솔직히 나는 멀리에서 봐도 아무것도 아닌데 주현이 뭘 보고 날 좋다고 하는지 그것도 모르겠어. 나도 내가 별로인데.”

“와, 이 놈 자아상이 똥일세.”     


재영은 성우의 자신만만한 사랑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다른 남자애를 좋아한다고 하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어쩌면 허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선명한 성우의 표정과 딱 부러지는 말투가 한없이 부럽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정말 성적표에서 나오는 것일까? 예전에 한 친구가 말한 게 기억이 났다.

‘나 초등학교 때 뭐든지 잘하지 않았냐? 공부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그때 왜 철봉 거꾸로 돌기 시범도 선생님 대신 내가 했었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고등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성적이 안 오르니까 다 못하겠는 거야. 지금은 공부만 못하는 게 아니라 체육도 음악도 잘못한다. 웃기지?’      


재영은 아닌 말로 자아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들이 유독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면 안개처럼 희미하다. 어쩌면 그게 자신의 자아상일지도 모른다. 희미한 안개 같은?     


주현... 네가 물었지? 그거 고백이냐고. 내가 그거 고백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네 얼굴...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던 거 알아?

그때 나는 알았어. 너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우린 시작도 못해보고 둘 다 실연을 당한 셈이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가사를 붙여달라고 했던 그 노래, 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거? 너를 보면 멜로디가 자꾸 떠올라 그 멜로디를 하루종일 흥얼거렸어. 그 멜로디를 부르면 뮤직비디오처럼 네 모습이 떠올라. 집중할 때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거랑, 앞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못 참고 자꾸 쓸어 올리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핀을 꼽는 거, 발표할 때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는 거, 그리고... 성우랑 장난칠 때 짓는, 성우 앞에서만 짓는 새침한 표정까지도.      

“이거 내가 쓴 곡인데 네가 노랫말을 써볼래? 바쁘면 말고.”

주현, 그날 내가 너한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솔직히 놀랐어. 넌 나랑 친하지도 않잖아. 몇 번 말도 안 붙여본 사이인데 내가 내민 악보에 당황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날 너의 새로운 표정을 봤어. 내 기타 소리와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네 표정이 맑은 시냇물 같았어. 그때 네 앞머리가 흘러내렸는데도 쓸어 올릴 생각도 안 하고 고요하게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그때 뭐라고 했더라? ‘재주 좋다. 딱히 어렵지 않으면서 곡이 좋네.’       

그 후로도 몇 번 우린 같이 나란히 앉아서 노래를 불렀잖아. 네가 지은 노랫말을 붙여서. 첫 번째 가사도 두 번째 가사도 마음에 들었어.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이제 더는 같이 앉아서 노래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뜸을 들였던 거야. 네가 마지막으로 준 노랫말은 좀 슬펐잖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작곡하고 네가 작사한 우리들의 노래는 딱, 그 정도인 게 맞다고. 흔한 사랑 노래처럼 애절할 것은 없지만 시작도 하지 못하고 우린 둘 다 실연한 셈이니까. 너무 슬플 것은 없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기억날 슬픔일 테니까. 안녕, 내가 처음 좋아한 주현.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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