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맘 편히 못 읽겠네

by 향기로울형

책을 읽을 때 한 권만 안 읽고 두 권을 병행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운 좋으면 두 책을 다 읽지만 대부분은 비교에 의해서(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저절로) 상대적으로 매력도가 떨어지는 책이 읽히지 않은 채 버려진다. 내 삶이 유한하므로 내 두뇌 용량이 작고 시간이 너무 짧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잔머리도 있는 것 같다. 이 습관은 대학교 1학년 때 생겼다. 그해 유달리 대학생들 시위가 많았고 그로 인해 학교에 갔다 하면 시국토론이 자주 벌어졌다. 뭣도 모르는 나도 한 마디라도 보태기 위해서 신문을 읽었다. 그러나 나의 독해 수준이라는 게 사건 사고에 대한 팩트 파악정도였다. 그때 같은 과에 영0라는 다부진 친구가 있었다.(재수해서 들어왔으므로 나보다 한 살 언니였다. 나는 그것을 이유로 나의 부족함을 감싸고 싶다.) 나는 동아리를 선택했다면 그애는 학과와 학생회를 선택했고 그리고 사물놀이를 선택했다. 그애가 내가 읽은 신문에서 파악해낸 팩트라는 것이 얼마나 선택적이고 편파적인 것인지를 지적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충격을 받았고 그리고 세상에 믿을 놈(신문, 혹은 책, 혹은 글) 없다는 식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글을 혹은 책을 폭 빠져서 읽다가도, 내 뒤통수에서 누군가가 '헤이, 맹목은 위험한 거야!'라고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오늘의 약속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시 <오늘의 약속>에는 뭔가 서글픈 행간이 있다.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무엇일까,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도 매일 뉴스를 보고 신문을 보고 개탄할 만한, 목소리를 높여 비난할 만한 일이 있나보다. 그러니까 약속까지 하자며 자신을 다독이고, 우리에게 그러자고 하는 거다.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슬퍼하는 시인이라서 그렇다.

사실 나는 무거운 이야기,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에 원래 관심이 없다. 어디 가서 '그것도 몰라?'하는 핀잔 듣기 싫어서 팩트를 파악하는 정도의 뉴스 시청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고공투쟁 중이던 어떤 노동자와 경찰의 몸싸움을 다룬 뉴스가 자꾸 눈에 밟혔다. 방송사에 따라 교묘하게 영상이 선택되어 편집되었음을 다룬 후속 뉴스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마음이 무겁다. 왜 세상은 마음 편히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할까? 그 예쁜 새소리를 약속을 해야 귀기울일 수 있다니. 왜 세상은 이 한 편의 따뜻한 시를 마음 편히 누리지 못하게 할까.


이전 05화냄새를 맡도록 기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