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살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화가가 있었어.
아내, 아들 하나, 딸 하나
화가는 파자마 차림으로 마당만 어슬렁거렸어
갓 중학생이 된 화가의 딸은 칼질을 잘했는데
서걱서걱 감자 써는 소리가 듣기 좋았어.
화가의 아내는 광주리 장사를 했는데
북한산 꼭대기에서 김밥과 떡을 판대.
동네 여자들은 숙덕거렸어
아마 술도 팔 거라고
화가의 아내도 칼을 잘 사용했는데
화가 나서 부부 싸움을 하면 칼을 들고 설쳤대
화가의 딸은 칼 솜씨만큼이나 공부를 잘했는데
"나는 학교 애들 보는 데서는 절대 공부 안 해."
그 영악한 속임수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어.
어느 날 작은 오빠 대학 합격 소식에 대책 없는 우리 아빠가
화가의 아내에게 돈을 빌리러 갔어.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격 좋은 아빠가 얼굴이 벌게져서 대문을 박차고 나갔대
"아니,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이 그렇게 비위 좋은 표정을 짓는다는 게 말이 돼?"
화가의 아내는 칼 솜씨만큼이나 입담이 훌륭했어
그 입담으로 내 비장과 위장이 먼저 찢어졌으니까
어느 날 화가가 국선에 당선되었대.
이상하지?
나는 괜히 서러웠어.
광주리를 이고 북한산 꼭대기에 오르던
입술 빨갛고 입담 좋은 그 아줌마가 아니라
새벽부터 김밥을 썰던 그녀의 칼이 아니라
매일 마당이나 어슬렁거리던 화가가
성공했다 축하한다 좋은 말을 다 가져가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