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동행한 이야기
14년 전 꽃샘잎샘이 지나 벚꽃이 꽃비로 내리던 날 정이는 내 품에 안겼다. 오늘은 큰 딸 정이의 만 14세 생일이다. 정이가 아침에 알람도 울리기 전에 벌떡 일어나자마자 먼저 한 일은 만 14세 미만으로 제한되었던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인스타 앱을 다운로드하는 일이었다. 묻지도 않고, 통보랄 것도 없이 구글로 물건 구매도 가능한 나이야, 축하해 줘라고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는 정이를 보며 그저 어안 벙벙하다. 만 14세가 된 중학생 딸을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잘했다고 할 수도 없고, 뜯어말릴 새도 없이 그런 나이구나 뒤늦게 장단 맞추기나 하는, 끄덕끄덕부터 해보는 거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그 뒤에 생각한다. 중2, 무슨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다고 만 10세 초등학생을 잘 아는 것 같지도 않다.
지난 일요일 만 10세 율이는 사회 과목 1단원에서 지도로 만나는 우리 지역을 그리고 지도에 따라 해당 지역을 방문하는 과제를 하기 위해 모둠 친구들과 스타필드로 향했다. 아이들끼리 하는 첫 나들이에 부모의 동의를 얻어와야 하는데 나는 당연히 호기롭게 잘 다녀오라고 우선, 말했다. 아이는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나는 알겠다고 선선히 대답하고는 당연히 몰래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명이나 움직이는 데다, 태풍급으로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린다고 하니 도와줄 일이 생길 것 같다. 우산을 쓰고 도로를 지나, 다리를 건너고, 개천을 끼고 비탈길을 올라 복잡한 먹거리촌 사이를 지날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게다가 율이가 리드를 하는 모양새가 왠지 까끄름하니, 내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밤 사이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새벽 햇귀가 들어 대기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다. 이른 아침 쨍한 햇살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눈에 안 띄는 차림으로 율이를 따라나섰다. 들은 말과 다르게 총 7명의 어금버금한 아이들이 학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왁다그르르 웃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멀찌감치 아이들을 쫓는다. 율이가 혹여나 눈치를 챌까 싶어 멀찍이 따라붙다가 놓친다.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에서 아이들을 눈으로 좇으며 비슷한 속도로 걸어간다. 신호를 기다리고, 좁은 길을 걸으며 사이좋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안심한다. 지하도를 지나니 박태기나무에서 아이들 닮은 진분홍꽃을 올망졸망 피웠다. 하나로 마트를 지나는데 한켠에 몽글몽글 작은 꽃봉오리가 팡팡 터져 흐드러진 보라색 라일락 나무에 시선이 뺏긴다.
아이들을 놓칠세라 재빨리 뒤따른다. 천천교 아랫길로 내려가 실개천을 따라 비탈에 오른다. 우리 가족이 늘 가던 길로 안내하며 둘째는 앞장서서 아이들을 끌고 나아간다. 나도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멈췄다 붙고 가까워지면 멀어진다.
가장 큰 변수라고 생각한 버들 삼거리에서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아이들은 잽싸게 뛰어간다. 나는 신호등에 숫자가 5를 가리키는 때까지 기다려 부리나케 뛴다. 숨차게 건너온 여기는 다른 세상인 듯 바람살이 느껴지나 싶게 서쪽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돌풍이 분다. 아이 중에 누군가 옷이 날아가니 서로 잡으려고 소리를 왁 질러대며 왁자지껄 한다. 도롯가라 유심히 보고 싶은데 그 틈에 내 모자도 날아간다. 그림책 속에서는 축전처럼 그려질 장면이 현실에서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아이들은 뒷전이다. 계속 벗겨지는 모자를 잡고 나부끼는 옷자락을 여미는데 폭풍우가 휘몰아쳐 나 혼자 혼비백산이다.
오픈런을 한 아이들은 입장 시간 10분 전부터 스타필드의 육중한 유리문 앞에서 입장 시간이 되기를 기다린다. 비바람이 없는 아이들 곁에 섞여 기다릴까 하다 체머리를 떨며 온몸을 붙안고 10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물론 그 틈에 7명의 아이들에게 별일 없는지 훔쳐보는 것은 기본이다. 얼른 입장해서 라떼 들고 책도 보고 봄옷 구경도 하고 싶다.
10시 정각이 되자, 유리문이 열린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 아이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나도 드디어 스타필드 안으로 입성한다. 아이들은 어느 방향으로 갔을까. 고개를 빼고 이쪽저쪽 연신 둘러보는데 온통 꽃밭이다. 레고로 만든 꽃밭은 아이들이 봤을까 궁금해진다. 1층 초입에 자리한 꽃집에는 흔하지 않은 외국 꽃들이 시선을 끌고 로비에는 통마다 가득 담긴 다채로운 꽃이 적당한 가격으로 묶음으로 판매하고 있다. 한 다발. 두 다발. 몇 다발 골라볼까 하는데 아이들이 에스컬레이터는 잘 탔는지 불현듯 불안해진다. 문자로 어디냐고 둘째에게 능청스럽게 물으니 아이들은 진작에 키즈 별마당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단다. 나도 그 곁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키즈 별마당 도서관을 찾아 서둘러 7층까지 오른다. 예전에 이렇게까지 올라온 것 같지 않아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씩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 하행도 이어져있지 않고 층마다 다른 곳에 위치해 있어서 요리조리 찾아서 타야 한다. 아이들은 놓치고 시간은 지체돼 지친다. 에스컬레이터 난간에 살짝 기대어 얼른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3층에서 드디어 맞닥뜨린 7명의 아이들은 각자 흩어져 책에 코를 박고 직접 계획한 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만 들고 온 책을 읽을 힘도 없이 다 귀찮아졌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벤치에 스러지듯 앉아 책꽂이에 머리를 기댄다. 눈동자만 굴려 부모와 함께 온 유아들을 바라본다. 아기들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함박웃음 대신 입만 빙긋 댄다. 아이들을 쫓아다니는 부모가 기특해 보이고 응원해주고 싶다.
1시간 즈음 흘렀을까. 도저히 기운이 올라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여전히 유유자적 책을 본다. 갑자기 내가 한심스럽고 부끄럽다. 아이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안 봤으면 싶은 마음에 후다닥 일어선다. 전면에 난 큰 창으로 비바람이 부는 횡단보도가 보인다. 돌풍을 뚫고 왔던 길을 혼자 갈 생각 하니 왜 아침부터 수선을 피웠나. 뭉근하게 바라봐 주지도 못하고 호들갑 떨며 아이들을 감시했다는 생각에 낯부끄럽다. 오랜만에 온 쇼핑몰이지만 둘러볼 마음조차 사라졌다.
1층 샛문 앞에서 날씨를 관찰한다. 비가 멈춘 듯해서 샛문을 살살 민다. 그 틈으로 바람이 훅 밀려들어온다. 문을 확 젖히고 나선다. 우산을 접는다. 여유롭게 횡단보도를 건넌다. 멋모르고 좇아온 길에서 홀로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남의 동네에 핀 꽃이나 둘러보며 천천히 가자고 생각한다. 스타필드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먹거리촌에 오래된 김치찜 가게를 일부러 지나간다. 가게 앞에는 늘 제철에 피는 꽃 화분들이 쪼로록 놓여있는데, 아직 오므려져 있는 하늘매발톱 바람에 흔들린다. 우리 아파트에는 한 그루뿐인 라일락이 여기에는 구석구석에 펴서 바람살에 향기를 나른다. 전신에 꽃내가 휘감아 눈이 절로 감긴다.
실개천길로 접어드니 웬걸. 바람눈이 바뀌었다. 축만제로 흘러가는 물길에 구름 사이에 감춰져 있던 햇발에 윤슬이 반짝반짝 빛나고 원앙 한 쌍이 함초롬히 노닌다. 나는 회돌목을 지나 오르막길로 거뜬히 올라가 다리를 건넌다. 도로를 두고 맞은편 꽃뫼버들마을 벚꽃길에는 명지바람이 불어와 연한 분홍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소리를 들으며 나부끼는 꽃비를 망연히 바라본다.
반나절 나마 어째 전혀 지루하지 않은 걷기를 했다. 변화무쌍한 날씨만큼이나 다이내믹한 봄을 만나는 산책을 할 수 있어서 문득 기쁜 마음이 든다.
하나로 마트에 들러 큰딸 간식거리로 초코파이와 나와 남편이 먹을 밤만쥬를 산다. 두 박스를 가슴에 한가득 안고 돌아서는데, 젊은 마트 직원이 아프다며 뛰어들어온다. 창 밖으로 우박이 후드득 쏟아진다. 짐을 모두 내려놓고 유리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것들을 뜻 없이 바라본다. 오늘 대미를 장식하기에 우박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날씨는 마지막까지 금상첨화인지. 우산이 없는 둘째에게 전화를 걸어 창문으로 날씨 확인하고 햇볕 나면 집으로 오라고 이른다. 이어 이제 잠에서 깬 큰딸은 어디냐고 전화가 온다. 아이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전화한 이웃 친구는 집에 오는 길에 있는 육교에서 천장이 떨어져 소방차와 구급차 와 있으니 피해 가라고 헐떡이며 전화한다.
하루 동안 궂은 날씨가 지나간다. 그 끝에 꽃내음, 흙내음, 나무 향기가 더욱 짙어진다.
율이가 오는 때에는 날이 좋아 놀이터에서 놀기까지 하고 느지막이 집에 왔다. 스타필드 안에서 다 같이 스파게티를 점심으로 먹었다더니, 말 끝에 실수를 한 딸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었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우선 거짓말은 부모 자녀 간에도 서로 신뢰를 잃으니 인간적으로는 하지 말자고 타일렀지만 나는 너를 미행하지 않았노라 거짓말했다. 아이는 그곳에서 사 온 아이브 카드에서 레이가 나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게 숨기고 유튜버가 되어 아이브 카드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어 올렸다. 우리 집에서 나만 모르는 척 나는 연기를 하고 있다. 혼을 내면 어차피 나 몰래 계정을 또 팔테니 모른 척,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둘째의 영상을 종종 본다. 어제 아이가 묻는다. 요즘 아이들 다 유튜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난 좋게 생각한다고 거짓말했다. 너는 비밀이 없느냐고 물었다. 없단다.
지금 핸드폰에서 정이가 구글에 로그인을 하고 새 앱을 깔고 새로운 기기에 로그인했다는 알림이 쉬지 않고 울린다.
봄밤 어둠 속에서 벚꽃이 지는 자리에 움푹 파인 물웅덩이를 뛰어넘으며 나는 지난겨울에 떨어져 썩고 있는 쿰쿰한 은행 냄새를 맡는다. 눈을 질끈 감고 메간 트레이너의 “Mother”를 들으며 쉿! 내가 네 엄마다, 흥얼거리며 아이를 기다린다.
그래.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는 지돌잇길, 안돌잇길 걸으며 지나가는 날씨를 응시하고 사라지는 뭐든 붙안고 살아야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