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구멍을 건너는 가장 멋진 방법*은 무엇일까.
미란 작가의 <<구멍과 나>> 에는 갑자기 만난 구멍에서 나온 낯선 이를 없애기 위해 구멍을 던지고 도망가다 빠지고 괴로워하며 급기야 물을 주는 경지에 이르고, 구멍을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온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미움의 정체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어제 가까이 다가가면 오늘은 한 발짝 물러나고 내일은 나까지 지리멸렬해지는 고리를 계속 돌고 돈다.
마침내 나는 내 구멍의 정체가 나와 구멍이 아니라, 내 구멍은 내 안의 구멍이기 때문에 그림책에 등장하는 구멍과 다른 구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안타깝게도 책 안에 제시된 수많은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나는 책 밖 경험을 통해 구멍을 극복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4월 성인 독서모임인 슬로우리딩에서 윤성희 작가의 <<날마다 만우절>> 소설집에 수록된 블랙홀을 읽으며 그제야 나는, 내 안에 구멍이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다는 것에 감동한다. 사라지지도 않고 없앨 수도 없는 구멍을 건너고 싶은데, 한 두 개가 아니라니. 오히려 구멍들을 디딤돌 삼아 물살을 건너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름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구멍들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했는데 혹여 그 구멍들이 합쳐져 구덩이가 되더니 되려 내가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니, 실체 없는 흐릿한 구멍은 강력한 괴수들이 봉인된 허천연에 봉인되는 상상으로 증폭하기까지 한다.
빌런인 허천연이 나오는 중국 드라마 <여봉행>은 천계와 영계 그리고 인간계로 나뉜 삼계에서 영계 벽창왕인 심리와 상고 시대의 마지막 신인 행지가 서로 짊어진 삶의 무게로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아가다 사랑하며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심리가 부상을 입고 영력을 잃게 되었을 때 치료를 위해 그들은 수만 년을 산 뱀 요괴인 금낭자를 찾아간다. 금낭자가 사는 설산에는 그녀가 떨쳐낸 욕망으로 가득 찬 구멍 하나가 있는데, 어찌나 욕망이 오래되고 강력한지 액체괴물 형체로 드러나고, 다른 강력한 욕망을 만나자 급기야 그 구멍에서 뛰쳐나와 주인을 놀라게 한다. 나는 여기서 내 안에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구멍 안에 깃든 욕망의 형체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A는 두 아이의 학부모다. 나를 도와준답시고 아이 멤버십을 하고 대관을 하며 성인 독서모임도 했었다. 그녀는 1인당 6만 원으로 한 달 책방을 이용하는 돌숲 멤버십을, 한 번씩 한 아이로 등록하고 번갈아 이용했다. 5일에 한두 번만 오는 친구들의 부모에게는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처하지만 한 번 오면 2~3시간씩 밀어 넣거나 30분 겨우 앉아있으면서 엄마랑 통화하느라 들락날락하는 아이를 나 몰라라 하는 심보가 얄밉다. 면전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까워서라거나, 잊었다거나의 이유로 지속적으로 한 아이 요금만 냈다. 내 지인이라는 말하고 다니는 이 사람이 지인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 대게 상습적이다. 나름 거리 두기를 하며 내 마음이 잠잠해질 무렵이면, A는 아이를 불규칙적으로 보내면서 책 읽는 습관이 안 생긴다고 카카오톡을 보내오거나, 이제 슬슬 읽으려고 하는 아이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해서 숙제를 하라든지, 다음 학원에 가라고 성화다. A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다가설 틈과 아이가 읽는 속도를.
게다가 자신은 순수하고 착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순수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쉽게 요구한다. 아이 마실 생수 한 병, 아이가 갖고 싶다고 독서 통장 한 권, 티백이나 커피는 기본, 출판사 사은품, 돌숲 무료 굿즈, 이벤트를 지나치지 않고, 성인 독서모임에 책정된 회비 1만 원도 나를 돕는다는 명목을 들이대며 자신은 1만 원어치 다 빼먹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병원이나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사이에도 들러 아이들이 오고 싶어 한다며 마음대로 밀고 들어와 뭐 가져갈 게 없을까, 놓친 게 없나 책을 훑고 사진을 찍고 참새 방앗간마냥 수시로 들른다. 자신의 아이 차례가 왔는데 아이가 읽던 책을 다 읽히고 가겠다고 미용실 이모를, 병원 간호사를 문전에서 기다리게 만든다. 그러고는 도를 아세요 사람들처럼, 시주하라는 보살 같은 시선으로 그녀는 나를 의식한다. 나는 이제 무엇을 그녀에게 내어놓아야 할까 진심으로 고민한다. 그녀는 Give & take 기조가 꽤 명확한데, 본전 생각을 곧잘 하는 나도 기이브 앤 테이크를 무척 반긴다. 다만, 주지 않아도 좋으니 가져가지도 마. 한 번씩 말하고 싶다. 나한테 뭐 맡겨뒀나요. 전생에 내가 그대에게 참 잘못한 거죠. 해탈한 어느 날에는 나도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이것저것 다 가져가라고 미리 챙겨주며 선심 쓴다. 나는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고 그녀에게 절대 얻어먹거나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그 끝에는 쓰디쓴 자기혐오만 남는다. 이 모든 게 느낌적인 느낌이라는 게 가장 골칫거리다. 나는 왜 이런 골치 아픈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다정도 병인양하여’라는 병명을 얻으며 다른 이에게는 다 내어줄 듯 굴면서 나는 왜 그녀에게는 절대 뺏길 수도 질 수도 없는 것일까.
초등학교를 품고 있는 아파트 단지인 이 동네에서는 거의 아이를 통해 어른 관계가 이어지는데, A는 특이하게도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A는 지인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나의 또 다른 지인과도 관계를 맺으면 원한 관계가 되다시피 했다. 헤어지면서도 A는 피해자 입장을 고수하고, '획득'이라는 울타리 안에 정신적 성장이나 배움, 재화, 사회적 관계등 가리지 않고 취할 것은 다 취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언제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닐까 상처받지 않을 미래를 대비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돌숲을 일으켰다든지, 도와줬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
A를 알면 알수록 나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겉으로 바른말 고운 말로 자애로운 행동을 하며 실제로는 내 고기가 언제 썩는지 호시탐탐 노리고 주시하며 주변을 맴돌다가 나의 빈틈을 꿰차며 일말의 연민 없는 비웃음으로 나를 일갈하며 결국 나를 잊을 A에게서 그저 나의 뒤통수를 지켜내고 싶은 것이다. 알면서도 당했다고 한탄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실 도와줬다고 한들 어떠하리. 돌숲을 살렸다고 한들 어떠할까. 뺏긴들, 준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즈음 되면 이 모든 게 지리멸렬해져, 한 동네에 살며 그냥 참자참자 몰라 몰라 몰라 책이나 보고 걷기나 하며 오늘 하루도 넘어가지는 것이다. 물론, A의 머리가 유리창 위로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그녀와 눈 맞출 시간도 없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된다.
이제 아이가 다니지 않아 엮일 일 없이 편해졌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A는 나를 돕는다며 건수를 만들어 왔다. 아이들 넷이서 독서모임을 하는데 한 달에 네 번 대관을 하면서 1인당 5천 원만 받으라고 한다. 그는 알까? 아이들이 두세 시간씩 독서 모임 후 책까지 보고 나면 책은 다 떨어져 있고 간식 부스러기가 나 뒹굴고 의자는 다 흐트러지고 의자와 책이 뒤바뀌어 자리하는 것을. 그들은 대체로 모른다는 듯이, 그래도 너한테 도움이 되잖아 말한다. 자신이 끼친 민폐와 정신적 피해와 자신이 받은 도움과 배려, 친절은 생각하지 못한다. 차라리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면 오히려 담백할 텐데, 너를 돕고 싶어서라고 거들먹거리며 우길 때는 꺼져줬으면. 세상에 돕는 게 어딨어, 세상은 온통 당신이 좋아하는 기브 앤 테이크라고. 내가 제라늄을 주면 상대는 제라늄을 보살피는 것, 책 선물을 하면 책을 읽는 것으로,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오고 가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Give and take는 호혜적 관계로 동일한 방식으로 돌려받지 못할 뿐, 순환하는 것이다. 물론 기브 앤 테이크도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치가 않지만.
A에게 전하는 진짜 도와주는 A의 예시)
1. A' 말이 없다.
2. A" 예외가 없다.
3. AAA 관심도 없다.
얼마 전 대관이 끝나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데, A는 이제 독서모임에도 여기저기 기웃대기 시작했다. 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여기까지 에너지를 쏟는 그녀가 놀랍기까지 했다. 게릴라 독서 모임에 들어와 제일 성실하게 인증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풀기로 한다. 그러나 이내 하이에나가 사냥을 하는 시선으로 자신의 말이 다 맞다는 투의 현상을 단정 짓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절대 손해보지 않으려는 습성까지 보태어져 그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억지로 다독인 마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 것을 빼앗아 가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잘하는 A를 보며, 결국에는 저런 사람이 살아남는 사실에 다시 분노하며 무기력해진다.
모임에서 만날 때면 하이에나처럼 오늘은 뭘 먹어볼까 하다가, 어느 날은 피해자 같은 시선으로 더 가진 자를 힐난하고,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한 혜택은 자신들이 더 못 가져가서 안달이었다. 이제껏 갖은 고생을 하며 다양하게 쌓아온 이력과 경험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해서 세상의 통념과 인생무상에 통달했다는 듯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를 볼 때면, 내 코는 시큰대고 눈물이 샘솟으려고 한다. 자신의 이면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이면만 꼬집으며 책까지 읽어대니, 자아성찰 빠진 자아성장까지 하고 별 거 없는 나를 어떻게든 발라먹고 발돋움하려는 그녀가 나는 진정으로 소름 끼친다. 더 끔찍한 것은 A를 하이에나 보듯 하면서도 곁에 두고서 견제와 균형, 혹은 연민을 핑계로 이리저리 궁리하는 나를 보는 것이다. 하이에나와 그녀를 하이에나라고 명명한 나는 생태계의 그물망 안에서 먹이사슬의 한 구조 안에 있는 각각의 요소일 뿐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안 먹히고 싶어진다. A를 이기고 싶다.
그렇다. 나는 왜 이토록 A의 이면에 일일이 감지하고 반응하는 것일까. 아직 내 나이 육십도 안 돼서 그럴까. 내 안에 구멍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그런 날은 종일 우울해하면서 그녀를 내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생존은 본능이니까 틈만 나면 그저 살아야 한다고 다독이는 그림책 <<틈만 나면>>이 미웠다. 어찌 되었던 살고자 내 마음에 뿌리내린 그녀에게 몸서리쳤다. 뙤약볕이 내리꽂는 한 여름, 아무도 없는 놀이터 모래밭에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으며 진녹색 잎을 모래 위로 뻗치고 하늘 위로 샛노란 꽃을 피우는 민들레를 보며 이내 내게로 꽃대를 내리다가 사방으로 가벼운 씨를 퍼트리기 위해 다시 줄기를 일으키는 민들레의 잔상에 몸서리친다. 퍼뜩 A가 스치며 나는 힘없이 뜨거운 볕 아래서 무릎에 고개를 묻고 민들레를 오래도록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A에게 잘해주다가도 멀어지고 가까워졌다가, 선을 넘으면 아연실색하며 튕겨나가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변덕스러운 나를 A가 몰랐을까. 그녀는 나의 변덕을 묵묵히 참으며 할 말 다 하고 챙길 것은 계속 챙기며 자기도 모르게 움찔대는 벌건 눈으로 무심한 듯 적당한 거리에서 나와 보폭을 맞추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또, 감지한다.
마음속에 일일이 까끄름하게 받아들이며 아이들과 A가 차라리 이사를 가면 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북토크 준비로 야근을 한 늦은 밤이었는데, 퇴근 후 야밤에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있는 A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조팝나무 흰 꽃내음이 진동을 하는 몽롱한 밤에 그녀는 또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걸었다. 굳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각을 세우며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이 비추는 다정한 모자를 아는 체 하지 않고, 그저 A는 당최 어떤 사람일까 골똘히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마음사전 54쪽
적어도 덜 미안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종의 노력을 기울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뼈저린 죄책감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진화된다. (중략) 어른이 된 후에는 부모와 사별한 후에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젊은 날 미움으로 잃은 나의 순수 대신 얻은 성찰을 되풀이하지 말아야지. 채찍질하고, 시험하고, 똬리를 튼 죄책감을 연장한다. 죄책감과 연민으로 각인된 아픔은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게끔 노력하게 한다. 거창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부정적인 감정은 기습적으로 침범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단편을 다시 읽으며 그이가 나한테 왜 그럴까 생각한다. 떨쳤다가 안쓰러워 한 발짝 움직였다가 확 다가오면 나를 구멍으로 밀쳐버릴까 두렵다. 어느 때는 자식부모마저 떼내야 할 때가 오는 것처럼 통렬한 아픔으로 다시 관계를 이어 붙였을 때, 관계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로, 나는 끊임없이 갈구한다. 구멍을 건너고 싶다 없애고 싶다 채우고 싶다. 그러나 미움은 반복과 번복을 진행하며 계속 뒷걸음질 치게 한다.
문제는 A가 단독일 때는 그나마 선을 그을 수 있었는데, A가 B와 C와 D와 연관이 되면서 생기는 나의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치를 떨며 멀어진 사람은 있는데 그녀와 지극히 친한 사람은 없다. 내 주변의 사람에게 소소하게 호의를 베푸는 데다, 주변의 사람은 A에게 딱히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의 괴로움 따위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므로, A를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범주에 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녀에게 있어 하나를 베풀고 자기 자랑에 나를 얹어서 사방으로 소문내며, 준 것을 기억하고 다음에는 그보다 더한 것을 교묘히 가져가는 존재가 돼버려 상상만으로도 벌써 지쳤다. 너무 괴로워 친한 B에게 말했더니, A 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못 받아 주냐고 한다. 나를 좋아해 주면 다 오케이 되나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감이 생겼다. A와 손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인 C는 A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좋아한다는 말에도 전달하는 자의 해석이 담겨서 이 말은 조금은 나를 납득시켰다. 한동안 A를 예쁘게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란다. 그러나 한 번 박힌 미운 털은 쉽사리 도려내어지지 않는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더욱 면밀히 주시하며 찰싹 붙어 숨통이 조여 오는 듯하다. 그저 D부터는 말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픈 데다 내 얼굴에 침 뱉기다. 그렇다. 'A가 진짜 나쁘더라'라고 겪어본 내 편을 만나고 싶었는데, 오롯한 내 편마저 없는 게 문제다. 이것은 철저히 나의 문제였다.
불현듯 내가 짝사랑하던 여러 여인이 떠올랐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먼저 연락을 하고, 안쓰러워하고 일거수일투족 다 신경 쓰며 더 못해주어 안타까워하다가, 결국에는 본전 생각에 선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패턴을 보이며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여인들이다.
문득 좋아하는 마음은 나와 상대를 병들게 하는 감정이구나, 섬뜩하게 애잔하게 통감한다. 미워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 모두 A였다. 동일한 질감을 지닌 미움과 애정은 기형적 행태를 드러내는 이음동의어였다. 그러나 미움과 애정은 내가 아니다. 내가 보살펴야 할 나의 여러 감정 중에 하나일 뿐.
추운 날 내게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들이밀고 나가는 A의 뒤통수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나의 거리 두기가 무색하게, 아니 무시하고 들이미는 그이가 혹 다시 나를 단련시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A는 내게 관심이 없다. 그녀의 심안은 무엇일까. 자신도 속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알면서도 낭창하게 내게 장난을 거는 것일까. 그런 게 왜 궁금해. 또 휘말린다.
그래. 또 휘말려보자. 그었던 선을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나의 변덕을 마주한다.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쌓은 책탑을 무너뜨리며 나는 더 이상 성찰하기 싫다, 그냥 직진하고 싶다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내 안의 스위치**를 켜고 빨갛고 다홍빛 꽃이 지질리게 핀 철쭉을 꺾어서 그녀의 입과 손을 때리는 상상을 찬란하게 펼치면서 말이다. 마흔넷 인생에 절대 마신 적 없는 달곰한 아이스바닐라라떼를 홀짝이며 인생에 '절대'라는 게 어딨어 중얼거린다.
지난 독서모임에서 읽은 <<날마다 만우절>>은 나를 완벽하게 위로해 준 소설이었다. 미워하는 A와 좋아하는 A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이 소설 마지막 단편을 아껴 읽으며 나는 그녀를 하루 동안 맘껏 미워하는 날로 나만의 만우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나 건재해! 나를 스스로 응원하기도 한다.
나의 변덕은 그녀가 감당할 몫이다. 얄브스름하고 투명한 선 하나를 끝과 끝에서 잡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결론이 나겠지.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오늘부터 시작된 벽돌팀 읽기 도서인 <<인간 본성의 법칙>> 1장에서 인용된 쇼펜하우어의 글이 마음을 녹인다. 아주 잠시지만.
뜻밖에 아주 야비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짜증 내지 마라.
그냥 지식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라.
인간의 성격을 공부해 가던 중에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하나 새로 하나 나타난 것뿐이다.
우연히 아주 특이한 광물 표본을 손에 넣은 광물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라.
결국 내 안의 구멍은 구멍과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 나는 구멍 언저리를 맴돌며 지나가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희망한다. 오늘도 책 속에서 연한 나의 과거와 만나고 나의 구멍을 들여다본다. 수많은 지식과 자아 성찰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늘고 있다고 자위하며 , 아니다 더 이상 나는 필요치 않을 것 같다고 비관하며 그래도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는 마음을 되새긴다.
상대를 이해하는 게 이 책의 목표라는 서문에서 A를 이해하는 게 나의 인생 목표는 아니라고 반박하며 이 지점에 대해 <<인간 본성의 법칙>>이 나를 무릎 꿇게 해 줄지 자못 궁금하다. 그저 오늘은 A를 욕하며 글을 쓴 미안한 마음으로 내일은 A에게 잘하려고 마음 먹는다.
*그림책 <<웅덩이를 건너는 가장 멋진 방법>>에서 차용했습니다.
**<<날마다 만우절>> 스위치 단편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