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였다가 숲이었다가
돌멩이 수프---> 돌숲
5월 안샘이 토요일에 진행하는 <어린이 슬로우 리딩 모임>에서 <<초등 신문 읽기>>를 교재로 읽고 토론하며 쓰기를 한다. 아이들이 줄임말을 쓰는 칸에 ‘포카’, ‘콜떡’, ‘요아정’에 ‘돌숲’도 슬그머니 끼어 있었다. 내가 돌숲을 열면서 제일 잘한 일은 돌멩이 수프라는 상호명을 정한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더불어' 가치와 '판타지구조'가 잘 드러나는 옛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잘 풀어낸 돌멩이 수프는 그림책방 상호명으로 찰떡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돌멩이 수프는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상호명이었다. 우리 돌숲에 온 첫 손님은 여기가 수프 가게 냐며 문을 빼꼼히 연 3학년 여자 친구였는데, 그것은 전조였을지도 모른다며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지금이라도 수프 가게를 하자고 말한다. 어쩌면 책방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법인 회사가 되고 계열사 중에 수프 가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각 잡은 앨's 북스토리는 아니지만 우회하여 돌숲 논술 학원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어느 강의에서 돌숲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직관적으로 매개체라고 답변을 했는데, 두고두고 그 답이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장을 열고 아이와 책을, 어른과 책을, 사람과 사람을, 책과 책을 연결시킨다. 그 대답으로 나는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돌멩이 수프에 어울리는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부캐였다. 그동안은 산등성이 끝자락, 한없는 들판에 자유롭게 솟은 영혼, 고사리로 살았다면 이제는 돌멩이로 수프를 끓여 사람들과 나누는 마법사로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주고받은 말의 힘으로 돌숲은 매개체로, 나는 마법사로 비스무리하게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호명을 정한 뒤에 나는 컨셉을 정하는데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유료 도서관 형식을 빌린 어린이 멤버십으로 운영한다는 아이디어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막연하게 전시와 북토크, 그림책 성인 수업, 독서모임, 대관, 납품 등의 차선이 있었지만 혼자 다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나는 어느 하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멤버십을 하는 책방은 전무후무 한 데다가, 생소하여 어떤 컨셉으로 채울지 그려지지 않아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돌숲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백문고를 운영하는 지인이 컨셉을 억지로 정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운영하다 보면 바뀌기도 하고, 오는 사람이 채워가기도 한단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고정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식이 나에게도 잘 맞았다. 나는 한 벽만 채우고 한 벽의 반은 비움으로써 용감하게 책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돌숲에 주된 수입원은 어린이 멤버십이다. 다음 수입원으로 안샘의 어린이 독서 모임이 있다. 성인 슬로우리딩은 한 달에 1만 원 회비가 있는 서른 명이 가입한 독서 모임이다. 이 세 가지 콘셉트가 주축이 되어 나머지는 유연하게 운영이 된다. 기획하는 모든 일이 영리를 취할 수는 없다. 멤버쉽처럼 중심 수입원이 있어야 한다. 모험처럼 뜻하지 않은 기회가 세부적인 수입원이 되기도 한다. 학부모의 재능기부로 자녀 독서모임을 이끌던 안샘께 무료 대관을 하면서 안샘의 어린이 독서모임이 탄생하게 되었고(주된 수입이 된), 돌숲의 나름 히트 상품이 되었다. 성인 슬로우리딩과 회비가 없는 벽돌팀, 게릴라 독서모임은 직접적인 수입원이 아니지만 내가 좋아서 시작한 독서 모임이라 아마 돌숲이 사라져도 이 독서 모임만은 계속 이어가지 않을까 꿈꾼다. 다 떠나고 한 둘 남아 할머니가 된 우리는 독서 램프등 아래서 담소를 나누며 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게 나의 새로 생긴 로망이다.
물론 독서 모임 자체가 직접적 수익이 아니라 해도, 이 멤버가 자녀 멤버십을 하고, 안샘 클래스에 참여시키며, 책을 구매한다. 개성 있는 다양한 개인이 모여 함께 읽고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 일원이 된다. 이 멤버 중에 한 분은 뜨개질과 AI 재능기부로 돌숲에서 강의를 열어 주셨고, 이것은 본격적으로 <돌숲 강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강의는 취미를 나누는 어린이 선생님으로 확장하며 <어린이 선생님 모여랏!> 강의까지 개설하게 되었다. 돌숲에 책 읽으러 오던 언니와 형아들이 선생님이 되어 미니어처 작품과 슬라임을 함께 만들고, 매미 우화와 겨울새를 함께 볼 수 있어 인기 만점인 특강이었다. 멤버 중에 한 동화작가님은 수원시 지원 사업으로 어린이들과 돌숲 신문을 만들어 주셨고, 직접 그린 그림으로 돌숲에 전시를 하며 동네에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멤버 각자 서로에게 인생과 육아에 있어 경험과 지혜를 나누며 보듬는다. 요란하지 않게 각자 자리에서 잘 살아냄으로써 서로에게 응원이 된다. 때로는 촘촘하게, 때로는 헐겁게 슬로우리딩은 상징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돌숲은 지원 사업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책방이다. 내 역량이 닿지 않아 지원 사업은 일찌감치 제쳐둔 일이지만 지원 사업과 납품은 언젠가는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다. 누군가는 도전하지 않는 게 돌숲의 힘이라고 말한다. 며칠 전에 지방에서 독서 강사를 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지원사업이 줄어 도서관에서 프로그램이 많이 사라졌는데, 그마저도 문화센터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센터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온갖 행사를 진행하면서 돌숲은 돌숲 문화센터라는 별칭을 얻었다. 강의 말고도 엉뚱한 이벤트를 자주 여는데 가령, 지난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돌숲 책이 꽂힌 책장> 인증 사진을 찍는 이벤트를 열었다. 매력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 이사하는 수준으로 대대적인 책장 정리를 하게 만들어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이벤트이다. 올해 3월에는 화이트 데이를 기념해 아이들 손에 꽃을 들려 보내며 자축했다.
날이 좋은 4-6월 사이에는 나들이와 캠핑으로 멤버십과 안샘 클래스에 인원이 줄어든다. 이 기간에는 적은 수익이라도 괜찮다는 마음의 대처가 필요하다. 함께 쉬며 재충전하는 시간이다. 고로, 재밌는 이벤트는 덤이다. 지난 4월에 <봄꽃 사진> 이벤트를 열었더니 예쁜 벚꽃과 아이들을 찍은 사진으로 혼자 가려내기에 벅찰 정도였다. 결국 셀카를 찍은 참여자에게 김경희 도자 장신구 선생님의 작품을 시상했다.
이번 달에는 <5월 가정의 달, 우리 아파트를 사랑하자> 이벤트를 열었다. 첫째, 어린이날을 기념해 랜덤으로 책을 나누어 주었다. 둘째, 우리 아파트 유일한 한 떨기 금낭화 인증 사진을 찍을 것. 셋째는 우리 아파트 엉덩이 동상이 있는 동산에 엉덩이 개수를 셀 것. 부상은 원하는 책을 선물로 드렸다.
꼭 책을 읽는 정공법만이 아닌, 책을 매개로 해 모이거나, 책을 읽게끔 유도하는 것. 그마저도 어렵다면 책의 언저리에 있게 하는 것이 이번 이벤트의 목표였다. 개인적으로는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다. 사진을 찍으러 온 동네를 뒤집고, 집을 뒤집어, 이런 책이 있었나 보고, 어떤 책을 받을까 고민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이 이벤트는 장기적으로 수익의 마이너스에 일조할 수 있고, 어쩌면 홍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추후에 어느 곳에 방점이 찍힐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벼운 철학이 가미된 이벤트였다. 거창한 사업이나 공공의 이익이 아닌, 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연 책방이기도 하므로 나름 가늘고 긴 안목으로 찰나의 재미를 추구한 일이라고나 할까. 겨울에 열심히 달린 돌숲의 재충전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공재인 도서관과 영리를 추구하는 책방은 마을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할까. 애서가인 우치다 마쓰루는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고 단언하지만 개인을 지지하고 건강한 사회를 지탱하는 공간으로,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본주의 논리로 파괴될 게 아니라 인프라로써 투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고 사업이라 하더라도 투자나 사업이 모든 도서관에 일괄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각 도서관은 질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서 결국 투자를 끌어와야 한다.
얼마 전 신도시에 있는 병설 유치원에 납품을 갔다가 친한 교사가 근처 시립 유치원과 경쟁해 살아남기 위해서 유치원 교사가 학부모 위원회와 회의를 하고 양말 한 켤레 나가는 일에도, 내일 수업을 위해서도 밤낮으로 아이디어 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서관과 책방도 제 기능을 다 하기 위해서는 문화센터 역할을 자처하면서까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버티는 마음으로는 어렵다. 장기적인 시각으로 열린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 남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은 돌숲의 라이벌이면서 협업 관계다. 나는 돌숲 근처에 자리한 일월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 아파트 단지 내에 작은 도서관에 자주 방문하여 차별성을 두려고 노력한다(대체로 스트레스받는다). 그러나 납품 혹은 팝업 스토어, 지원사업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서 상생하고 공존할 일도 꽤 많다 (처리할 일이 많다).
어린이 수가 줄어드는 전 세계적 추세에 돌숲은 비껴간다는 보장이 없다. 안샘이 할머니가 되도록 클래스를 계속한다는 확신이 없다(종신 서약을 할까). 돌숲을 가늘고 길게 운영하자는 모토로 나는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방안을 계속 생각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안샘을 대신해 내가 언제든 강사로 투입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면 줄어든 안샘의 수익에 맞게 이벤트 없이 살아가거나 혹은 월세를 줄여달라고 상가 주인에게 사정을 한다.
멤버십을 대체할 수 있는 희망도서와 납품을 실시하며 그림책방의 면모를 다진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어쩌면 이 때는 작업실 분위기가 날지도 모른다.
다양한 스타일의 책방으로 돌숲 1호점의 연장선상인 돌멩이 수프 서산점은 2호점, 영동 반야사 근처에는 돌멩이 수프 북스테이로 3호점을, 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돌숲 4호점은 비영리 도서관으로, 대학가에 돌숲 5호점은 북카페로 오픈하는 것이다. 각 지점이 속한 지역 특성에 따라 공간이 추구하는 정체성이 달라야 하는 것이 돌멩이 수프의 정체성이다. 여러 지점이 다 수익을 낼 수는 없지만, 서로 상호보완 된다.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책방은 단순히 책만 팔지 않는다. 책방지기의 컨셉이나 취향, 가치관에 따른 그 책방만의 정체성을 띤 책을 매개로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이 된다. 수원에는 글쓰기와 출판 중심으로 운영하는 담해북스, 기획과 마케팅이 돋보이는 아뮤컨셉, 예술성과 기획 모임이 돋보이는 마그앤그래, 독립출판 중심으로 운영이 되는 그런의미에서, 새라는 특정 분야에 특화된 탐조책방, 교회 신념을 중심으로 북카페로 운영되는 책방마음이음이 있다. 돌숲은 어린이와 어른이 쉬어가는 아지트를 컨셉으로 멤버십과 성인 독서모임으로 운영을 계획했다. 그러나 독서 통장을 쓰고 안샘의 어린이 클래스를 열면서 교육이 강화되었고, 아지트에서 유료 도서관으로 변모했다.
책방은 모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서관이나 카페, 혹은 쇼핑몰처럼 동네에서 여러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그동안 돌숲에서 진행한 활동에서 사람들이 여러 애칭을 갖다 붙였는데 거의 다 마음에 들었다. 밤에 독서모임이 이뤄질 경우에는 돌숲 호프가 되고 아침에 모임을 하면 돌숲 카페가 된다.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의 돌숲 상담소가 되고, 성장기 어린이가 모이는 곳이라 이가 매일 한 번씩 빠지다 보니, 돌숲 치과가 된다. 방학에는 돌숲 영화관을 개관해 먹고 떠들며 시끌벅적하게 우리만의 영화를 본다.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청팀 홍팀 나누어 운동회를 치렀다. 언제나 오른쪽에 핀을 가지런히 꽂고 오는 r은 다 흐트러진 채로 등원한다. 머리 묶어주세요! 집에 빗이 없는 나는 우리 아이들 머리도 잘 빗어준 적이 없다. r이 뒤돌아 서는데 불현듯 몰캉몰캉해지며 예쁘게 잘 묶어 주고 싶은 마음이 깃든다. 얼마 전인데도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치장을 하는 데까지 신경을 쓸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의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의 아이를 돌보며 어린이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돌숲의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가도, 내가 맡은 아이들의 지금 시간을 담아내는 게 내 일이라고 늘 되뇌인다. 비위가 약해서 우리 아이 똥도 겨우 치우던 나는 이제 다른 아이가 눈 설사를 재빠르게 치우고 오줌을 닦으며 이제야 진정한 육아 베테랑이 되었다.
돌로 수프를 끓여 모두가 배부르게 먹는 마법사가 되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선생님이 되고, 책을 판매하는 사장님도 되고, 대표도 되며 엄마도, 이모도 된다. 아이들이 학원 가기 전에 급할 때는 공부방, 숙제방 선생님도 된다. 돌멩이 수프를 운영한 2년 6개월은 내게, 책방이라는 환상을 깨고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며 ‘돌숲은 교육과 보육이 맞물리는 책방이다.’를 자영업자로서 덤덤히 받아들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 개인이 책방지기로 성장한 만큼이나, 돌숲도 다양한 컨셉과 역할을 해내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책방은 책이 매개가 되어 나와 공간, 나와 타인, 공간과 타인, 타인과 타인 등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책은 이사할 때 빼고는 나쁜 게 하나도 없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2층 따스한 볕이 드는 공간을 만나 돌멩이 수프라는 작은 책방이 탄생했다. 시간과 사람을 품은 돌숲은 다채로운 서사가 움트는 장으로 계속 변화한다.
이제야 1학년 생활을 2개월을 보낸 친구가 스승의 날 작은 선물을 챙겨 와 수줍게 내민다. 작년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민망스러워, 선물을 받을지 돌려보낼지 혼란스러웠는데 올해는 뭉클한 마음이 되어 겸허히 받아 든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꾸뻑, 고개 숙여 아이들 앞에서 말했다. 작은 손에 담아 온 온기에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내 안에서 자란다. 어제가 꿈틀댄다.
수리수리마수리. 이제 3년 차 돌멩이 수프는 수프였다가 숲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