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올해 칠십이 된 엄마에게 나이가 들어 미각이 둔해졌다고 말했다. 엄마는 혀를 대충 닦으라고 말한다. 지난해에는 머리 땜빵이 세 군데 생겼다고 했더니 엄마도 젊은 시절에 자주 원형탈모가 왔었다며 가게를 접으라고 말해 머리 땜빵은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었다.
올해 칠십이 된 엄마가 말한다 인생은 가지각색이라고. 엄마 입에서 나온 짧은 문장은 원래는 평범한 단어의 조합이지만 평생을 맞음과 틀림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살아온 엄마가 한 말로는 굉장히 낯설고 유하게 들렸다. 나는 엄마가 오빠네 집안 살림을 하고 조카를 돌보고 주말이 되면 근처에 있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단조롭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굉장히 바쁘다고 하신다. 수학 학원 원장인 오빠가 낮이 돼서야 출근을 하면 친구 사귀기를 까끄름해 하는 엄마는 그제야 이모나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고, 오빠가 조카를 위해 데려온 초코라는 개를 산책시키고 tv를 보다가 살림을 하다 조카가 오면 간식과 식사를 챙기고 라이딩을 하신다. 개는 정말 싫다던 엄마는 귀찮아하면서도 사람 보며 계속 낑낑대는 초코에게 신경이 쓰여 더 바빠지셨단다. 개 산책 길에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만나면 다들 손주 키우다가 이제는 자식이 데려다 놓은 개까지 책임져야 한다며 이게 뭐냐고 하신다. 그러고 나면 저녁이 되고 6학년인 조카랑 힘겨루기를 하다가 올케 언니가 퇴근을 하면 저녁을 차리고 늦은 밤 오빠가 퇴근을 하면 오빠와 tv를 보다가 엄마 방에 가서 잠을 주무신다.
어버이날을 의식해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 핸드폰에 내가 수신차단 돼 있어서 전화를 걸자마자 끊어진다. 엄마는 오빠를 기다려 차단을 풀었는데 나한테 미안해하시는 것 같다. 전화기 너머로 얼마 전에 눈 수술을 했다던 오빠의 목소리도 들린다. 뭐, 엄마의 무의식에는 내가 곧잘 차단이 되나 보다. 오빠에게 안부 전화를 하지 않은 나는 그러려니. 문득 요즘은, 다들 잘 있어줘서 고맙고 다행한 일이라고 끄덕끄덕 인다.
저번에 데려온 새가 죽고 둘째가 꽤 오랫동안 슬퍼해서 이번 어린이날에 동대문에 가서 다시 잉꼬와 같은 흔한 새를 데려오기로 했다. 시부모님께서도 함께 가신다고 하셔서 지은 지 3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아파트 1층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걸으며 부모님을 기다린다. 건너편에 새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들어섰는데 선을 그은 것 마냥 이쪽에는 젊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외솔 아래서 멀리 못 나가는 노인들에게 시든 야채를 파는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은 동네 사람과 정구지를 다듬으며 오랜만에 온 듯한 바짝 마른 할머니에게 통 안 보여서 걱정했다는 안부를 주고받는다. 저만치 서 있던 나는 아버님이 좋아하는, 꼭지가 시들었지만 알새가 알찬 수박을 한 통 사서 남편 손에 들려 보낸다. 혼자 남아 송진 가루가 물에 섞여 흘러가는 연둣빛 물을 바라본다. 지대가 낮은 데로 꼬불꼬불 흘러가는 물 끝에 즈음 차에 탄 두 아이가 핸드폰을 보느라 여념이 없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혼자인 나는 아파트와 연한 주택가에 벌겋게 핀 장미 한 떨기로 걸음을 옮긴다. 연이어 터트릴 준비를 하며 하늘로 불뚝 솟은 촛불 모양의 작고 오밀조밀한 꽃봉오리들에 아, 5월이라는 것을 기다리며 이제야 감탄한다.
시부모님 댁 근처에 깍두기가 맛있는 오래된 맛집인 모래내 설렁탕집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는다. 오래된 집이라 아기띠를 한 젊은 부부와 다양한 연령대의 부모들이 북적인다. 나는 시켜놓은 설렁탕 여섯 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아이들과 부모님이 앉은 상에 놓을 깍두기와 김치를 잘게 자른다. 다음 주면 어버이날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의 사람이 많아 설렁탕이 나오는 데 한참 걸린다. 옆 자리에 자식 내외와 함께 온 젊은 할머니가 큰 깍두기를 맛있게 베어 먹는데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 왠지 나보다 이가 튼튼할 것 같다. 우리 앞으로 빨간 점퍼를 입고 백 살은 됐을 법한 백발의 파마머리 할머니가 오십은 돼 보이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설렁탕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넘긴다. 엥 아기가 보채는 소리에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아기띠를 한 엄마가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살짝 살짝 흔들며 아기를 달랜다. 어쩐지 어릴 때 우리 할머니 환갑잔치에 온 동네 사람과 친척이 다 모여 잔치를 벌인 그날 같아 설렁탕 허연 훈기에 눈물이 뜨겁게 고인다.
다 먹고 나서는데 나는 이 사이에 낀 고기가 빠지지 않아 이쑤시개로 이를 후비며 나오다 빛이 바랜 파란 수국을 본다. 조화라고 말하는데 화장실에서 뒤늦게 나오던 어머님이 대충 보시고 진짜 꽃이라고 하신다. 나보다 눈이 좋은 어머님은 이도 안 후비신다. 다만 어머님께서는 화장실을 자주 가실 뿐이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님을 턱이 높은 suv에 밀어 올리며 승용차로 바꿀까 퍼뜩 생각이 든다. 얼마 전부터 나는 움푹 파인 곳이나 눈에 아지랑이 같은 게 많이 보여 시술을 받은 남편을 생각하며 운전하기에는 아직 suv가 나은가, 우울증이 찾아온 남편을 위해 둘째 태어날 때 샀던 suv를 바꿔주려고 마음먹었다.
저번에 갔을 때는 시위로 한창 걸렸던 거리가 주말이라 해도 한산하다. 광화문에서 체증이 풀리며 정치 이야기가 나올락 말락 한다. 맨 뒤에 찌그러져 있던 아이들도 태극기 부대 이야기를 꺼냈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한다. 저번 산소 가는 길에 정치 문제로 싸웠던 아버님과 남편도 얼버무린다. 나는 갑자기 왜 웃음이 비져나오면서 물을 확 끼얹고 싶어 지는지.
친정 부모님이 왔을 때도 나는 경상도 아빠와 국민의 힘 골수 팬인 엄마한테 남편은 오로지 민주당이라고 이야기를 꺼내 싸움을 붙였더랬다. 아침에 한 말과 저녁에 한 말이 달라 유시민을 제일 얄미워하는 아빠와 선견지명이 있어서 유시민이 낙이라는 남편 사이에서 엄마는 본인이 제일 중립이라며 윤석열과 이재명은 아니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신나게 웃었다. 요새는 퍼질게 웃을 일이 없다.
우리 여섯 식구는 지난번 갔던 미화조류 가게로 다시 천천히 걸어간다. 미화조류 간판이 보이는 마지막 횡단보도 앞에 서자 어린이날을 맞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부들로 활기찬 생기가 돈다. 저번 길에는 보이지 않던 듬직하고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당수나무처럼 창신동 어귀를 지키고 있었다. 요새는 죄다 이팝나무만 있지, 은행나무가 잘 없는데 아버님이 운을 떼신다. 그 말씀을 받아 어머님께서 내가 율이 낳고 김천으로 이사 가서 요맘때 내려가 보니, 거긴 다 하얀 이팝나무만 있더라, 하신다. 정이 낳았을 때 안산에는 온통 벚꽃이 흩날리더니. 문득 나도 더 늙으면 어머님처럼 나무로 꽃으로 새로 지난 시간을 추억하려나, 나이 든 어머님이 애틋해진다. 우리 아이들은 다 잘 자랄거야. 그럼그럼. 두 분이 주고 받으신다. 초록불로 바뀌어 남편과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사라졌다. 나는 왼쪽에 어머님을, 오른쪽에는 아버님을 팔짱 끼고 신호가 다시 바뀌기 전에 그들 머리 꼭대기를 놓칠세라 총총 뒤따른다.
아버님은 또 화초닭 세 마리를 산다. 둘째도 아버님 따라 사고 싶어 한다. 나는 둘째를 말렸는데 어머님은 요즘 공공근로 외에는 일이 없어 부쩍 심심해하는 아버님을 못 말린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님은 번호도 잘 안 보이는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산 꼭대기에 있는 학교에서 cctv를 보는 일을 하다가 이제는 학교 안전지킴이 일을 하신다. 눈도 안 보이는 노인네 위험하다고 안 말리는 자식들을 친정엄마는 이해를 못 하지만, 나는 차마 말릴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120세 시대에 이런 소일거리라도 없다면 노년에 어르신들은 남은 생을 어떡하나.
얼룩덜룩한 화초닭 세 마리와 하얀 잉꼬 한 마리를 데리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며 덩치 큰 은행나무 아래서 서성인다. 이북에서 태어난 아버님을 생각해서인지 남편은 임진각으로 가잖다. 화초닭을 얼른 집에 풀리고 싶은 아버님과 걷기 싫은 어머님과 방 한 켠에 틀어박혀 게임에 열중하고 싶은 아이들은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한다. 이대로 아쉽다며 계속 임진각에 가자고 우기는 남편에게 왜 그러냐고 채근했더니 젊은 시절에 그곳에서 현희 형이랑 운전 연수를 했던 곳인데 요즘따라 너무 가고 싶단다.
그래, 점점 계획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 가족이 예전에 살았던 아현동이나 지나가자며 방향을 튼다. 아현동은 나도 학교를 가고 글을 쓸 때 살았던 곳이다. 피카디리극장을 지난다. 사라진 서울극장을 지난다. 충정로에서 영화관의 부활을 꿈꾸며 화양극장에서 드림시네마로 리뉴얼된 극장을 떠올린다. 많이 좋아했던 장국영이 이쑤시개를 물고 나오는 영웅본색이 재개봉될 때 혼자 들락거렸던 곳이다.
그러나 내비게이션만 보며 운전하는 남편은 길을 잘못 들어 원래 가던 길인 영천 시장을 지난다. 어머님께서는 필동에서 아현동으로 이사 와서 아현 시장에서 장사를 꽤 오래 하셨다. 새벽에 영천 시장에서 떡을 떼와 팔았던 고단한 삶에 대한 말씀을 시작으로, 우리는 아버님께서 원단 시장에서 자수성가하신 이야기를 또 듣게 되었다. 백 번도 더 들었다고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이야기를 우리는 언젠가는 데자뷔처럼 맞닥뜨렸다가 이내 잊히면 아쉬워할 날이 올까. 이 순간만큼은 내 마음에 오래 머물다, 오랜 시간 뒤에 지금을 떠올리며 탄식하길.
어머님댁 베란다에는 새로 사다 심어놓은 수국에서 꽃망울이 터지려고 한다. 매년 이맘때 우리 아파트 버찌 연못 한 켠에 하트가 은방울처럼 쪼로록 달린 금낭화가 여기에도 있다. 십자매 커플과 동대문에서 데려온 화초닭까지 집어넣으니 베란다가 가득 찬다. 아버님은 털이 복슬복슬 난 이파리를 가리키며 무슨 나무인지 맞춰보라고 하신다. 새 냄새에 킁킁대며 꽃사과냐고 여쭈니 사과나무인데 사과가 열리면 어머님 따주려고 심으셨단다. 아니, 로또도 당첨되면 우리 떼주려고 열심히 긁으신다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그만, 통장에 있는 돈을 반 뚝 떼주면 되는데 왜 굳이 로또에다가? 속으로만 말한다. 닭이 모이통과 물을 자꾸 엎질러 얕은 종지에 물을 받아오시는 어머님이 다 내 일이라고 중얼거리신다. 허리를 수그려 새장에 종지를 집어넣는 어머님 주변으로 모두 빙 둘러서 바라본다.
두 분은 무료해서 성당에 다시 나가신다고 한다. 견진성사를 아직 안 받으신 어머님은 성당에 하도 젊은 사람이 없어서 한 달에 네 번만 나가도 견진성사를 해주기로 하셨단다. 7월 초에 열리는 견진 성사에 나도 어머님께 드릴 미사보를 새로 사서 가겠다고 했다. 수줍게 웃으시는 두 분을 뵈며 주일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성당에 다시 나가볼까 생각하다, 이내 생각만 하기로 한다.
시어머님도 며느리와 아들이 먹을 밥을 해두고 아들이 좋아하는 참외를 깎으며 받아먹기만 하는 우리가 오는 게 어디냐고 속으로 계속 생각하실 것 같다. tv를 틀지 않은 방에서 넷이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어머님께서 갑자기 웃으신다. 아버님 오른쪽 얼굴에 신경이 죽어서 노화가 진행이 안 돼서 처진 왼쪽 뺨과 얼굴이 비대칭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이가 드니 할 일이 없어서 아버님 얼굴을 더 잘 들여다보게 된단다.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보시며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냐고 놀라신다. 저 염색 안 하면 백발이에요 어머니,라는 말을 10년 전부터 했는데 처음 하는 것처럼 또 말했다. 나도 그래. 어머님과 나는 베란다 문으로 비추는 햇덧을 쬐며 같이 웃었다.
어머님께서는 더 이상 1층으로 우리를 배웅하시지 않는다.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가볍게 돌아선 우리는 매번 자주 들러야지 생각하다가 때를 놓친다. 1층으로 내려와 주차된 차를 기다리다가 어느새 낮에 본 장미 넝쿨 앞이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지난 검붉은 장미 열매 한 알이 지지 않고 방금 붉게 핀 장미 옆에서 달돋이를 맞이한다. 나도 해넘이를 보내며 지난 열매와 붉게 핀 장미 사이에 나란히 서서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린다.
내 등 뒤로 70세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하늘 너머 시선을 둔 채 담배를 핀다. 지난 주말 아침 우리 아파트에 햇살을 받아 형광빛 이파리가 가득인 칠엽수 아래서 벌써 반바지를 입고 오른손으로 연신 담배를 피며 남은 한 손에 쥔 핸드폰을 보던 젊은 아빠들과는 대조된다. 이 틈 어디 사이에 늘 끼어있었을 남편과 나는 이제야 잃은 순간과 통과하는 시간을 알아차리며 지난 것은 흘리고 우리에게도 곧 당도할 노년을 좇아가고 있다. 담배 냄새를 맡으니 별안간 골초인 아빠가 떠올라 엄마한테 전화를 거니, 이번에는 신호가 한 번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