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ㅈㅊ중학생들은 하나 같이 우리 학교 급식이 제일 맛있다고 극찬한다. 신학기 초에 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총회에서 교사 소개 시간에 환호 소리가 제일 컸던 분도 영양사였다. 총회를 마치고 학부모 자원봉사를 문의했을 때 혹시나 급식을 먹어 볼 수 있을까 기대감으로 난 두말없이 급식 모니터링에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9월 8일 ‘8시 1층 급식실’이라고 총회날부터 핸드폰 달력에 기록돼 있었지만 오늘이 다가올수록 현실감이 없었고 막상 당일이 되었지만 아무도 모르는-학교 확인 문자도, 주변에 이 일을 아(하)는 사람도, 나와 같이 신청한 사람도- '급식 모니터링'에 나는 긴가민가 한다. 보통 어느 강좌를 신청해도 신청한 날부터, 전날까지, 당일까지도 확인 문자가 여러 번 오는 여러 경우와 달리, 당장 학교 측에서 중요 알림은 앱이나 문자, 담임교사의 수신이 불가능한 채팅창에서도 여러 번 확인 안내가 오는 시스템인데도 불구하고, 청소년 발달에 엄청 중요하기 때문에 총회 날 '급식 모니터링' 신청자를 받았을 텐데도, 그런 사실을 없었던 양 아무도 내게 어떤 언질도 없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메모를 언제 했으며, 왜 했으며, 누구와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두 번 확인하지 않으려고 신청문을 보고 기록을 해뒀을 텐데, 신청자 입장에서(학교 측에서 혹은 급식실에서) 왠지 형식적으로 신청만 하고 제발 눈치 없이 진짜 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내심 궁금해하면서 아니, 의심하면서 계속 이 일정이 손톱의 거스러미처럼 짜증 나게 신경이 쓰였다. 딸보고 학교 측에 문의하라고 시켜야지 생각만 하다가 오늘 아침이 되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뒹굴거리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 우선 씻고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깨우고 나서 또 고민한다. 확실치 않은 일이기는 해도 이 일정을 피해 다른 약속을 잡지 않은 나는 결국, 가기로 결심한다. 나간 김에, 겸사겸사 걸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몇 달 만에 청바지를 껴입고 나선다.
당연히 뛰었다. 아무리 학교 앞에 살고 있어도 10분 전에 나서니 마음이 다급하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5초를 남겨두고 뛴다. 잡념을 없애는 데는 역시나 뛰는 게 최고다. 오는 내내 고민했으나 결정한 이상 제 시간 안에 도착해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달렸다. 아무리 선선해졌다고는 하나 청바지는 무리였던 것일까. 아이 학교에 가면서 다이소에서 5천 원 주고 산 반바지 차림의 운동복은 입고 가기 싫어서 겨울방학부터 찌기 시작한 살들이 들어가는 청바지를 찾아 입은 게 너무 두꺼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 무리였구나 알아차리며, 아직 붉은 장미가 피어있는 학교 담장 울타리 아래를 지나 교문 안으로 들어선다. 헉헉대며 학교 안에 들어섰지만 급식실이 어딘지 모른다. 큰 아이한테 물어라도 볼걸, 아이 일에 늘 한 발짝 무심한 나를 속으로 탓하며 연신 두리번거리다 겨우 제 시간, 7시 59분에 드디어 ‘급식실’을 찾아 들어간다.
헐레벌떡 들어오는 나를 다급히 제지하며 앞이 막힌 고무 실내화로 갈아 신으라는 조리사 외침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하얀 가운에 하얀 모자를 쓴 하얀 얼굴에 발그레한 볼터치를 한 영양사 선생님이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나를 극진히 맞아주며 안내한다. 부직포로 된 흰 가운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나니 영양사 선생님 복장과 비슷하다. 섬세한 그녀는 내게 거울을 보며 머리 정리를 다시 하란다. 염색된 모든 머리를 한 올도 빠짐없이 모자 안에 다 밀어 넣고 나니, 거울 속에는 진분홍색 입술만 동동 떠서 영락없이 무개성의 40대 한 인간의 얼굴이 있었다.
이제 마음은 유치원 원생 마냥, 고분고분하게 영양사를 따라 손을 씻고 종이 타올로 닦고 휴지통에 버린 후에 비닐장갑을 낀다. 등을 구부려 고개를 잔뜩 숙이고 양손은 아랫배 위로 가지런히 올리고 눈을 반짝이며 심기일전하여 영양사 선생님을 뒤따른다. 우리 집보다 청결한 스텐 설비들을 지나 교실에 배식차를 보내기 위해 배식차를 정리하는 분주한 조리사 선생님들 사이를 겸허히 지나간다.
이곳에서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급식실이라는 곳이 조리를 하는 게 주된 일이 아니라, 소독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양 조리 전후 특히, 소독하는 과정이 굉장히 시스템화 돼 있다는 것이다. 첫째도 둘째도 청결했다. 가령, 앞치마와 고무장갑은 빨강, 핑크, 미색으로 나눠져 있어서 조리할 때는 미색 앞치마와 미색 고무장갑을 사용하고, 소독을 할 때는 핑크색, 설거지를 할 때는 붉은색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소독기 안에서 정육점에 매달아 놓은 지육같이 죽 정렬돼 있어 조금 소름끼쳤다. 그리고 도마와 칼 기둥조차도 고기와 생선, 야채를 구분하고 색을 통일하여 소독기 안에서 역시나 정렬된 채 소독되고 있었다. 이 정도는 우리 집 칼 도마 소독기가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납품으로 들어오는 청포묵과 치즈떡이 담긴 밀키트도 겉봉지를 모두 소독물에 소독을 하고, 소독물을 받는 호스가 따로 있는 데다가, 바닥이 아니라 천장에 다 매달아 두어 밟히지 않게 정리해 두었다. 나는 소독은 둘째 치고, 이 감긴 호스가 머리 위로 떨어져 다칠까 염려스러웠다. 질문이 있냐는 말에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없다고 말했다.
학생들 식중독이 걸리는 대부분 원인이 김치 때문이라고 한다. 배추를 절이고 씻고 양념을 하여 묻히는 일련의 과정이 다 분업화 돼 있어서 어디서 소홀히 할지 모르고 그러다 보면, 박테리아가 충분히 창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치 업체를 선정하는 일이 까다롭고 대기업이나 친환경 센터에서 공구를 하는 등 까다로운 공정에 의해 들어온단다. 그렇다면 김치를 학교마다 담그면 안 되냐고 궁금해하는 건, 아무래도 월권이겠지? 이 질문도 역시 속으로 삭인다. 이제 나는 이 상황에 서서히 젖어들어 급식실 실습생이 된 듯하다.
대부분 당일 재료는 당일 소진을 기본으로 하지만 기름과 같은 지방맛 조미료나 고춧가루, 소금, 식초 등 조미료는 장기 보관 냉장고에 보관한단다. 다른 데서는 정제염을 쓰지만 맛을 중요시하는 영양사 선생님은 신안 천일염을 쓰고, 들기름은 국산을 쓰는데, 참기름은 국산 수급이 어렵고 가격이 높아 이제 외국산을 쓴단다. 식용유도 NON-GMO인 해바라기씨유와 현미유중에 현미유는 튀김류에 적합하지 않아 해바라기유만 쓴다고 한다. 포도씨유만 쓰는 20년 차 주부인 나는 해바라기씨유도 NON-GMO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아는 게 많아지는 유익한 시간이다. 따라다니며 계속 말씀을 듣다가 메모지를 꺼내 적을 걸 그랬나, 녹음기로 녹음을 할 걸 그랬나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인터뷰하는 익숙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실습생에서 격상해 ceo로서 직원의 보고를 받는 듯한 기분도 든다. 성과 보고 하듯이 계속 발표하는 영양사 선생님을 치하하고픈 마음이 드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거나 그녀가 말씀하는 사이사이 나를 쳐다볼 때 눈을 초롱초롱하게 치켜뜨고 "어머, 대단해요" 추임새를 넣는 정도가 다 다.
그러나 점차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급식 맛은 보고 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는 게, 내가 한심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년의 여성들 사이에서 좋은 엄마, 좋은 학부모 코스프레로 남아도는 아침 시간에 자원봉사라도 해볼까 했던 중년 여성으로서 자괴감이 마음 한편에서 고개를 쳐든다. 뭘 하는지 모르고 무턱대고 온 나는 여러 선생님들을 방해하며 감시하는 기분이 들어 민망하고 죄책감이 든다. 아이들 급식을 담당하는 선생님들께 나는 조력자라는 걸 강력하게 어필하고 싶은데, 라뽀가 형성되지 않은 노동의 현장에서 나는 난데없이 불청객 같아 저절로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다. 어쨌든 산업 현장의 모니터링은 안전과 품질 보증 담보를 위해 핵심적 메커니즘이라고 합리화시키며 정신 승리로 내 맡은 역할-이방인 혹은 불청객-을 충실히 다 하기로 한다. 뒷짐 지고 한발 물러나 질서 정연한 급식실 생태를 직관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눈을 반짝이며 일사불란한 영양사와 조리사 선생님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것이 오늘 내 일이다.
그 역할이 극대화된 것은(가장 자괴감이 든 것은) 농수산물, 축산, 공산품 업체에서 당일 조리할 재료를 실은 납품 트럭이 들어올 때였다. 조리사 선생님들이 국민체조를 하는데, 한편에서는 납품이 들어온다. 나도 매일 요즘 국민체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좁은 조리대 사이에서 국민체조가 가능한지, 청결할 수는 있으나 위험하지는 않은지 혼자 전전긍긍하는데, 그 사이 영양사가 "들어온다" 소리치니 조리사 선생님들은 체조를 하다 말고 후문에 일렬로 선다. 학교 부지가 좁아 교실 배급이 이뤄지는데, 주차장 역시 좁아서 납품 트럭이 급식실 후문 앞에 주차할 즈음 교사들 차량까지 들어오면 복잡해지는 모양이었다. 주차장 자리가 있다 없다 운전자들에게 안내하며 납품 트럭과 일반 승용차의 교통정리까지 하는 영양사 선생님을 보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오도 가도 못하는 운전자들 대신에 내가 여기를 박차고 나가 차라도 빼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차를 뺐다 넣었다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납품 기사님이 급식실에 물품을 인계하자 어디선가 "납품 기사님은 베스트 드라이버"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운전대를 잡은 이상, 누구든 어떤 난관에서든 차를 대고 차를 빼야 하는 것이다. 베스트 드라이버는 오늘 두 분이었다.
친환경센터에서 공동구매한 파와 당근, 콩나물 같은 야채는 들어오자마자 박스에서 꺼내어지고 문 옆에 자리한 전자저울에 무게를 달면, 영양사가 무게와 생산지를 확인하며 기록한다. 그 사이 조리사 두어 분이 운반차에 얹힌 소쿠리에 그것들을 담으면 다시 영양사가 농약잔류기로 수치를 재고, 이것은 다음 대기하는 조리사에게 넘겨져 바로 세척대로 옮겨지며 그제야 세척이 한쪽에서 이루어진다. 비닐에 담긴 냉동 주꾸미와 같은 수산물은 물이 찬 개수대에서 녹여지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끝이 상한 깻잎을 자르는 조리사 선생님들 한 무리가 있다.
국민체조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채 끝나기도 전에 급식실은 이미 가동이 시작되었다.
오늘 ㅈㅊ 중학교 급식 메뉴는 주꾸미 볶음과 새우젓 콩나물국, 청포묵 김무침이다. 우리 큰 아이는 매워서 주꾸미는 못 먹을 테고, 청포묵은 좋아해서 몇 번을 받아먹겠다는 계산이 든다. 나도 먹고 싶다. 먹고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데,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어지러워지기 시작해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샘솟는다.
모니터링을 기록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하는 짧은 직선 길에 물이 끓고 있는 큰 스텐 솥 서너 개를 지나는데, 영양사 선생님이 원래는 가스 솥이었지만 조리사 선생님들 건강을 생각해 전기로 바꾸었다고 말씀하신다. 옆에 자리한 단기 물품을 보관하는 스텐 냉장고는 매일 닦아도 하얗게 성에가 낀다며 냉장고 문을 손수 열어서 보여 주시고는 이제 겉에 물방울까지 맺혀서 올해 지원받은 예산으로 교체할 거라고 학교 기밀처럼 내게 살짝 알려 주신다. 이런 것까지 내게 보고하듯이 혹은 수다 떨 듯이 다 말해주는 그녀 옆에서 솔직히 나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나중에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한 지경에 이르러 꽤 오랜 시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두 번 다시 나는 급식 모니터링을 신청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떻게 인사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야광 조끼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교통정리를 끝내고 쉬시는지, 운동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정자에 앉아 계신다. 더 이상 누군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인사도 않고 도망치듯 나와서는, 학교 담장 아래에 선다. 학교 담장 울타리에 핀 장미가 제일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걸어 다녔던 길이다. 이곳은 어째 늘 조용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체육 하는 소리, 수업하는 교사 음성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말소리가 밥 냄새에 섞여 아스라이 맴돈다. 탑돌이 하는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어, 이웃 동네 주택가로 향한다.
그 사이에 진정된 기분은 새삼 영양사 선생님과 조리사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번져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 먹거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분들 손길에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점심을 먹고, 그 맛에 학교를 간다. 덕분에 나는 학부모로서 아이들 먹거리에 관한 한 진절머리 날 정도로 급식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모든 게 내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차천로 14번 길 엘리펀트빌에 다다른다. 주변에 쉬고 있는 경찰차는 보이지 않는다. 빌라 주인장께서 장인 정신으로 풍선덩굴을 한 올 한 올 직접 올린 대문으로 들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의자에 털썩 앉는다. 저번 날, 살피꽃밭을 돌보는 수줍은 주인장에게 여기 자주 와도 되냐고 제대로 묻지 못한 나는 오늘은 제대로 만나 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온 터라 작정하고 기다리기로 한다.
내 시선 정면에는 장독 6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잘 닦인 장독에 부레옥잠이며 물배추, 몬스테라, 물양귀비, 어리연, 워터코인 등 읊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수생식물이 옹기 뚜껑에 담겨 단정하게 놓여있다. 하나하나 시선을 옮길 때마다 여러모로 산란했던 마음이 정화된다. 그제야 일어나 나도 이제 국민체조를 시작한다.
그리고 꽃밭에 심은 식물들과 그동안 보이지 않던 화분들을 세심히 관찰한다. 내가 선물 받아서 두고 간 고양이 화분에는 산세베리아가 심어져 있었다. 고양이 화분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화분 안에 담긴 식물이 산세베리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이름 모르는 다육이겠거니 했는데 주인장께서 분갈이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그 안에 개구리알을 키운다 해도 이제 내 것이 아니므로 상관이 없긴 하다.
바라볼수록 경이로운 살피꽃밭이다.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지는 아악무는 어떻게 잎이 이렇게 반들반들 윤이 날 수 있을까 경탄스럽다. 과습이나 과건으로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운명을 달리하는 포인세티아는 어떻고, 초록잎으로 뒤덮여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자잘한 식물인 트리안과 페페, 아악무도 있고 할머니 꽃밭에서나 봤던 소철, 관상용 까만 고추가 있어 눈이 즐겁다. 추억의 식물은 언제나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침 대문자 에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S의 자녀인 삼 남매의 영어 선생님이자 우리 둘째의 영어 선생님인 미즈 dear 댁에 포도 한 박스를 가져다 드릴 건데 같이 가자고 한다. 그 포도를 말할 것 같으면, 이 한 철 이벤트로 잠시 사 먹을 수 있는 충량이라는 종자로 씨 없는 송산 포도다. 유혜진 작가님의 시어머님이 작게 포도 농사를 지어 알이 익는 날에만 자식들이 모여 포도를 따서 포장을 하며 택배를 하고 돌숲으로 배달을 해오는 것이다. 나도 5박스 정도 샀고, S도 그러하다. 대충 1박스는 직접 먹고, 나머지는 대부분 선물한다.
미즈 dear 댁은 엘지 아파트 15층 꼭대기다. 노후된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를 하고 있어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아이들 수업마저도 9월 한 달 동안 줌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요전날 나는 포도 킬러인 미즈 dear를 위해 충량포도 3kg 1박스를 이고 15층까지 날라다 드린 경험치가 있으니, 심신이 피로한 S 대신에 내가 올라가겠다고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포도를 건네받아 아파트 계단에서 뛸라는데, S가 심심하니까 같이 올라가잖다.
느낌상 혼자 가는 게 더 빨랐고, 덜 힘들었지만 함께 너털너털 웃으며 올라간다. 끝까지 줌수업을 속으로만 반대한 S와 나는 바리케이드 쳐진 엘리베이터와 창살 없는 큰 창이 아이들이 계단을 오르기에 충분히 위험 요소가 있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학부모가 데려다주더라도 오르내리다가 어른이 쓰러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줌 수업으로 수업료의 50프로를 경감한 미즈 dear의 현명하고 훌륭한 판단에 다시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수다로 떨었다.
겨우 1층에 다다라 뭐라도 먹자는 S를 다시 남의 집 살피꽃밭인 엘리펀트빌 다시 데리고 간다. 얼마 전까지 투자 목적으로 빌라 매입을 고려한 S의 남편 덕분에 S는 이 건물을 상당히 매력적으로 바라본다. 나도 둘째가 중학교에 가면 이 빌라로 이사 오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으므로. 꽃자수가 놓인 양산을 쓴 아낙이 지나가며 우리 대화에 낀다. 빌라서 나오는 주인장의 아들인지, 남편인지 하는 남자가 구경하는 우리를 보고 싱글벙글 웃는다. 그래서, 지나가는 우리에게 늘 기쁨과 행복을 주는 주인장은 언제 볼 수 있는 것인가. S가 그만 밥이나 먹잖다.
엘지 아파트와 성대 방향으로 이쪽저쪽 실컷 걸은 우리는 오픈 시간도 되기 전에 주꾸미 전문 식당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안돼 더 돌다가 오란다. 내가 가는 온 데를 다 보여주며(내 걷는 아지트가 다 털렸다.) 11시에 맞춰 근근이 들어온 우리는 주꾸미 볶음을 기다리며 두부를 무한 흡입한다. 갑자기 S가 매일 이 정도 걸을 것 같으면 산으로 가란다. 뭐 하러 산으로 가느냐, 남이 다 가꿔 놓은 거 나는 걸으면서 예쁘다 예쁘다 하며 거저 누리며 되는데. 그러다 언니 만나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출근하면 그만한 행복이 어딨나.
어쨌든 내 무의식은 주꾸미볶음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날이었나 보다. 주꾸미 볶음에 삶은 소면을 비벼 후루룩 한 후, 밥까지 야무지게 비벼서 양배추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고는 메가 커피서 아이스 라떼 한 잔 마시며 돌아간다.
S는 우리 가게에는 팔지 않는 ㅈㅊ 중학교 국어 자습서를 사러 다른 서점에 걸어간단다. 반나절을 보내고 이미 뿌듯해진 나는 한숨 자고 일어나 1시 즈음에 출근해야겠다고 이제 헤어진다.
필로티 아래를 지나 모서리를 도는데 찬 바람이 선득하게 얼굴을 때린다. 바람길이다. 바닥에 별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하늘에는 물들어 가는 단풍이 손짓한다. 이대로 들어가기 아까워 마시던 라떼를 내려놓고, 주변을 휘 둘러본 후, 국민체조를 시작한다. 청바지도 주우죽 잘 늘어난다.
왠지 오늘 낮잠이 쉽사리 오려나 모르겠지만, 오후 출근을 위해서 이제 자러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