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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엘 Dec 31. 2019

밴드 피아(彼我, Pia)를 추억하며 (1/2)

라떼는 말이야

올해 있었던 일 중 나를 가장 아프고 힘들게 했던 것은 밴드 피아의 해체였다. 올 초 러시아 여행 중 이 소식을 접하고 이르쿠츠크 길거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4년 전 스페인 세비야의 한 호스텔 침대에서 잠에서 깨자마자 린킨파크의 보컬 체스터의 자살 뉴스를 보고 두통이 밀려왔던 것이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피아의 공연을 간 것보다 안 간 것이 월등히 많고, 일면식도 없으며 음악적 행보 이외의 정보는 거의 모른채 살아왔다. 그런데 이들의 현장 사운드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이렇게 피아의 해체를 아쉬워하고 아파하는 이유는 그동안 록 페스티벌을 비롯해 록씬에서 즐겨왔던 지난 약 20여 년의 나의 시간에 피아가 늘 있어왔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지난 시간들을 하나 둘 곱씹어 보며 추억에 젖어 보았다. 피아의 활동과 함께 나의 시간도 돌아보고 그렇게 지난 시간을 맘껏 아파하고 추억하고 슬퍼하기로 했다.   









내가 밴드 피아를 처음 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마 2001년이 맞을 것이다. 당시 서울 홍대 인디씬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그리고 닥터코어 911이라는 신예 괴물들이 새로운 물결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크라잉넛은 일찌감치 드럭(현재 클럽 DGBD의 전신)에서 광기를 뿜으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었는데 당시 지방에 살던 고3이었던 나는 성인이 되면 꼭 서울에 가서 드럭에서 놀자고 친구들과 약속하곤 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꿈이었는지. 그러다 부산 출신의 피아라는 밴드가 있는데 심상치 않다고 입소문이 났다. 레이니썬이라는 부산 출신의 밴드가 싸이키델릭이란 장르로 이미 굉장히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메탈을 하는 피아라는 팀이 레이니썬과 견줄만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구매한 '하드코어 2001'이라는 컴필레이션(합작) 앨범을 보면 그때 록씬에서 가장 핫한 밴드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사실 당시 진짜로 핫했던 컴필레이션은 '아워 네이션'이라는 크라잉넛, 노브레인이 주축이 된 당시 최고 조선 펑크 밴드들의 작품이다. 지금은 구할 수가 없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그때 사둘걸..) 아무튼 하드코어 2001 앨범엔 갓 데뷔한 6인조 형태의 피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앨범 참여 직후, 피아는 장장 18년 동안 유지될 5인조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싸인회 때 이 앨범을 내미니 멤버들이 레어템이라고 반겨주었다.





1998년 부산에서 동네친구끼리 결성한 밴드 피아는 말 그대로 상경을 해서 2000년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2회의 숨은 고수로 뽑히며 본격적으로 서울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참고로 1999년 1회 숨은 고수 중에는 피아의 형제 밴드 넬이 있으며, 이후 몽니, 국카스텐, 안녕 바다 등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밴드가 다량 배출되었다)





이후 2002년 피아는 서태지 컴퍼니 소속 레이블에 합류하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이름도 지긋지긋한 '서태지가 인정한'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그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을 밴드 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즐기게 만든 훈장이자 주홍글씨이기도 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마침 성인이 되었겠다 (완전한 경제적인 독립은 아닐지라도 아무튼)독립도 했겠다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피아가 있었다. 그들은 모든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고 더욱 승승장구하며 2004년 린킨파크의 싱가포르 투어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린킨파크의 후원으로 미국 진출이 논의됐으나 아쉽게도 불발되었다. 당시 린킨파크가 엔딩곡 One step closer를 할 때 체스터가 피아의 보컬 옥요한을 급히 불러서 함께 부르는 장면은 아직도 회자되곤 한다. 왜냐하면 당시 린킨파크의 세계적인 위상은 독보적이었는데 이러한 팀이 우리나라의 '인디'밴드에게 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피아가 '인디'밴드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원래는 음반 제작 및 활동에 필요한 자본을 직접 충당하는 경우를 인디, 즉 독립 음악이라고 간주했으나 지금은 다소 추상적인 '대중성'을 기준으로 소위 '대중적이지 않으면' 인디 라고 부른다. 후자에 따른다면 피아는 슬프지만 완전히 인디 뮤지션이다. 되도록 이런 분류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각종 '인디씬'이 탄탄해야 음악산업이 다채롭게 유지될 수 있다는 의견에도 적극 동의를 한다.)








아무튼 피아는 텔레비전에는 없었지만 공연장엔 늘 있었다. 내 기억엔 당시 아무 페스티벌이나 가면 피아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들의 무대를 눈으로 본 적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원숭이』(1집 수록곡, 피아의 대표적인 로고로 표현되는 동물이다) 인트로가 나오면 아 죽으란 얘기구나 하고 정말 죽을 것처럼 놀았고 『소용돌이』(2집 수록곡, 한동안 고정 엔딩곡. 관객들이 서클 핏을 만들며 방방 도는 것이 포인트)가 나오면 아 또 죽으란 얘기구나 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기 때문이다.





이게 메탈이라고는 하는데 그렇게 못 알아들을 정도의 막무가내는 아니고, 또 그렇다고 절대로 모던하지 않은 그들의 사운드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얼터너티브', '하이브리드 록' 혹은 '뉴메탈' 아니면 '이모코어'라는 갖다 붙이기 나름의 장르라고 불리는데 그런 구분 또한 크게 의미는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연에서 관객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사운드를 장착했으니 우리는 장르고 나발이고 그냥 재밌게 놀면 장땡이었다.  





그들은 2001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인 1집부터 2007년에 발표한 4집까지 광란의 질주를 하고 각종 록 페스티벌을 독식했다. 2000년대 초중반의 우리나라 록 페스티벌 시장은 아주 가파르게 성장했고 내가 고삐가 풀렸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 축복의 기간을 여한 없이 즐길 수 있었다. 당시 인디밴드들의 성지 '쌈지 싸운드 페스티벌'을 비롯해 최초로 해외 뮤지션을 섭외하기 시작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서태지가 본인의 이름을 걸고 만든 'ETPFEST'가 성행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내 기억엔 피아와 스키조(아주 세련된 사운드를 구사하는 메탈 밴드. 사운드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무대매너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베이시스트 혜림은 정말 독보적인 캐릭터였다. 많은 관객이 그를 보러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가 투탑으로 공연을 장악했었던 것 같다. 이 두 팀이 합동 공연을 하는 날이면 말 그대로 축제였다.


 



4집까지 최정점에 섰던 피아는 2008년 EP 앨범 Urban Explorer를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일렉트로닉 요소를 반영한다. 지금 유행하는 EDM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만 이전에 워낙 야생의 메탈 사운드를 구사해왔기 때문에 조금만 뿅뿅 소리가 들어가도 엄청난 변화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보컬 역시 예전에 비해 힘을 굉장히 많이 뺐고 기타톤도 유해졌다. 예전의 광란의 포효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보컬이 슬럼프네', '피아 뜨더니 이제 변했네', '이젠 대중성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냐' 같은 혹평을 쏟아냈다. 노래를 들어도 공연을 가도 예전 같은 광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놈의 메탈의 경로를 벗어나는 느낌에 왠지 모를 배신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안 그래도 소외되는 메탈인데 피아까지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 5집을 그렇게 열심히 들으며 벽 보고 생각의 의자에 앉아 반성 중이다.





그러나 보란 듯이 피아는 2012년 KBS 밴드 경연 프로그램인 탑밴드에서 우승을 한다. 서태지컴퍼니에서 나온 이후 이룬 첫 쾌거였다. 심사위원으로 나와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데를 나오냐는 원성이 자자했지만, 당시 피아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밴드가 이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뮤지션들은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텔레비전에 출연해 이름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록)페스티벌은 서서히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이름하에 (특히 메탈)밴드의 무대를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아는 밑져야 본전인 탑밴드 우승을 차지하고 각종 록페스티벌에서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강력해졌음을 확인해줬다. 그렇게 건재함을 보이며 정규 6집과 데뷔 15주년 기념음반까지 발표했지만 결국 올해 2월 해체를 발표했다.






"늦었다기엔 빠르고, 갑작스럽다기엔 예정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옴에 따라 아픔과 고통에 주저하며 당신들께 오직 미안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변화와 흐름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한번 거슬러 오를 수 없음을 느끼며..."
출처 : http://cafe.daum.net/pia1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공연에서 종종 하곤 했었다. 계속되는 무대 규모 축소와 티켓 판매량 부진이 너무도 눈에 띄게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해체 발표 후 피아가 보여준 행보다. 그들은 커리어와 관계의 끝맺음에 대해 그야말로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인 '유종의 미'의 정석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며 음반을 대거 처분하는 와중에도 피아 앨범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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