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엘 May 31. 2019

생선과 평정심

그런 날이 있다. 쌀밥, 국, 김치가 있는 정통 한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밥'이 먹고 싶었다. 가는 길에 있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자 하고 길을 나섰다.


꽤 오래되었다는 생선구이집 앞에서 서성 거렸다.


- 한 명도 돼요?

- 네 들어오세요.


삼치구이 하나를 시켰다.


낡은 벽에는 코팅된 연예인 싸인이 빼곡히 붙어 있고 벽과 천장이 마주하는 코너에는 선풍기가 곧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배추김치, 데친 미역과 초장, 오이소박이.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찬이다.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옆 테이블에 무거워 보이는 큰 솥을 놓으시더니 자리를 잡고 갓 지은 밥을 주걱으로 휙휙 젓고 산처럼 쌓인 밥공기에 본격적으로 밥을 하나 둘 담으신다.


- 제일 먼저 줄게.


가장 먼저 담은 밥을 주셨다. 악의 축으로 규정한 정제된 탄수화물인 하얀 쌀밥이다. 이렇게 갓 지은 쌀밥을 먹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주머니는 빛의 속도로 밥공기들을 바삐 채웠다. 오랫동안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던 나의 엄마도 하루 종일 저렇게 일을 했겠지. 가난 속에서 자식새끼들 먹여 살리겠다고 그랬겠지. 저렇게 떨어질 것 같은 선풍기 밑에서.


- 그러게 뭐하러 그런 데를 끼어가서 그런데. 하여튼 극성이야 극성.

- 꼭 남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해외를 그렇게 끼어들 가지. 쯧쯧.


헝가리에서 발생한 대형 인명 사고 뉴스를 보며 나누는 아주머니들의 대화에도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혀 하루를 그르치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된다고 반박도 했겠지만 이젠  이상 화도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 고등어는 1인분에 한 마리인데 삼치는 반 마리에요.


꾸덕꾸덕하게 구워진 삼치가 길게 반토막이 되어 나왔다.


- 잘라 드릴까요?

- 네


공손히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생선이 다 잘라지기를 기다렸다.


유독 생선 요리를 많이 했던 나의 엄마의 영향으로 생선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다른 육고기 보단 소화하기에 부담이 덜하고 그 특유의 비릿함이 고소하다. 껍질만 먹어도 고소하고 대가리 살을 바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방문을 여니 침대 위에 슬픔이 누워 있었다는 9와 숫자들의 평정심을 무한 반복하며 길을 나섰다. 건강식만 들어가던 위 속에 김치, 쌀밥, 삼치가 두둑이 채워졌다. 왠지 오늘은 커피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로 오메가 3도 안 먹어도 되겠네.

작가의 이전글 삿포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