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차
2016. 11. 9.
맑은 날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 오는데 매일같이 이렇게 늦게까지 자버리면 일출은 언제 또 보려나. 산굼부리와 용머리해안 중 어디에 갈지 고민하다가 산굼부리에 가기로 했다. 산굼부리의 억새는 시간이 지나 시들시들해지면 다시 볼 수 없지 않냐는 ㅇㅇ님의 말에 설득됐다. 지난 번 사려니숲에 왔던 것처럼 교래사거리까지 와서 버스를 갈아탔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엔 수많은 짝수들이 있었다.
하늘공원을 떠오르게 하는 커다란 억새밭이 눈 앞에 보인다.(물론 수많은 짝수들도 하늘공원을 떠오르게 했다.) 은근히 부는 바람따라 억새끼리 스치는 소리가 나는 억새밭 안에서는 겉보기에도 단단하고 커다란 사진기를 들쳐업은 아저씨 아줌마가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분들이 파파파팟 전문가스러운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고 사라지면 나도 그 자리에 가서 그들을 따라 툭툭 찍어본다. 아이 별로다.
하늘이 깨끗해서 어디를 어떻게 찍어도 훌륭해보인다. 언덕 위에 올라가면 더 선명하게 보이는 한라산의 파아란 윤곽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따라 그리다가 밟을만한 두께로 눈이 쌓이면 백록담을 보러 올라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 아래 산굼부리 글자로 만든 의자 포토존의 줄은 여전히 줄어들 생각이 없다. 44층 건물만한 깊이라는 산굼부리 분화구 안에 있는 단풍나무를 보다가 굴러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 발짝 떨어져 사진을 찍었다.
4시에 가까워지니까 햇빛보다 바람의 힘이 더 세져서 게하로 돌아가는 730번 버스를 탔다. 아침에 나올 때 탔던 그 버스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좌석의 낙서가 그대로 있는 게 신기해서 혼자 낄낄대다가 찬 바람이 새어나오는 버스창문을 등지고 잠이 들었다. 처음 왔던 날 반팔로 뛰어다니던 이 길을 이제는 패딩조끼에 목토시까지 뒤집어쓰고 뛰고 있다. 등 뒤로 넘어가는 해 때문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보고 놀란 새끼고양이 재빠르게 담을 넘어 도망가더니 뒤를 한 번 돌아보길래 웃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