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5만원)
2월 21일 (5만원)
어쩌다보니 3년째 정원대보름 날 같은 알바를 하고 있다. 단오였나 여튼 무슨 절기를 기념해서 아트센터에서 하는 행사 스탭으로 처음 일을 했었는데 그 뒤로 가끔씩 연락을 주셔서 후리랜서마냥 일을 가끔 했었다. 일은 쉬운데 돈은 적지 않게 주는데다 무엇보다 중요한 밥과 장갑을 주니까 착하디 착한 알바다. 그리고 여태 해 본 알바 중에서도 매우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곳인데 그게 뭐라고 뭔가 안심되고 기분이 좋다.
회기시장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지만 일하러 왔던 걸 빼면 그닥 자주 와봤던 건 아니다. 스무 살때 서울 구경 하겠다고 매주 수요일마다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친구들이랑 한 번 왔었고, 군대가기 전에 집에서 빨래개다가 괜히 답답해서 전망대에 가보려고 왔던 게 전부다. 그땐 좀 쌀쌀하다 못해 추워지는 계절이어서 BMX타는 멋쟁이들도 없었고, 구제역이 돌 때라 살아있는 사슴도 없어서 기억 속에는 뭔가 휑하지만 나름 조용한 맛이 있는..... 아 그리고 전설의 드림랜드가 살아 숨쉬는 땅이기도 하고. (08년에 사라진 드림랜드가 굳이 모두에게 전설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룡열차를 탔던 곳임.)
이 동네 주민들의 정확한 연령 스펙트럼까지는 알 수 없으나 꿈의 숲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연령 폭만큼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분수 비슷한 수영장(?)에 뛰어드는 평균 신장이 1m정도 되는 애들부터 가만가만 앉아계시다가 아트센터에서 가져다 놓은 투호놀이에 혼을 쏟으시는 어르신들까지.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열리는 행사들이 은근 다채롭다. 작년에는 너무 추운 날씨때문에 민속놀이 체험 프로그램이 없었는데 올해엔 달집태우기 전까지 앞마당에 윷, 투호, 널을 깔아놨다. 거침없이 대형 윷을 집어들고 윷놀이 규칙을 잘 모른다는 애들한테 그냥 모두의 마블처럼 하는 거라고 사기를 치고 있었는데 걔네 아빠가 오셔서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명절 때 받아뒀던 소원지들도 이미 수북해서 달집에 하나하나 엮는 것도 일이었는데 근처 사는 열한 살짜리 애 두 명이 도와줬다. 그냥 꺼내놓으면 꽤 손시려울 날씬데도 열심히도 한다. 나는 솔직히 애들이 어렵기만 한데 같이 알바 온 친구놈들은 애들한테 말도 잘 건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와 학원 진짜 많이 다니네. 그러면 죽고 싶지 않냐?"고 얘기하는 마타 입을 막아버렸어야 했는데 늦었다.
소원지를 작성하는 애기들한테 지금이 기회라고, 필요한 걸 다 적으면 엄마 아빠가 이뤄주실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남의 소원들을 슬쩍슬쩍 훔쳐봤다. 작년 소원에는 엘사 인형이 대세였는데 올해는 터닝메카드가 소원지에 자주 등장했다. 나도 올해 명절 때 터닝메카드를 처음 봤는데 역동적인 변신에 한 번 놀라고 믿을 수 없는 가격에 한 번 더 놀랐다. 심지어 그걸 이마트에서 줄 서서 산다니.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소원은 "친한 친구 OO랑 같은 반 되게 해주세요" 였는데 난 이제 반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 조금 울적했다. 누구와 같은 반이 될지가 가장 큰 관심사일 때가 나도 있었는데.
작년 대보름에도 함께 알바를 했던 마타가 "우리 내년에도 여기 올라나. 취업 못 하면 오겠지?" 라고 묻길래
나는 그냥 조용히 타고 있는 달집만 바라보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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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진짜 이뤄지든 안 이뤄지든 다 이뤄질 거라 생각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