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아들의 면도...
얼마 전, 경기도에 사는 아들 집에 갔다가 전기면도기를 챙겨왔다. 사실, 챙겼다기 보다는 아들이 전기면도기를 새로 살 거라며 제가 쓰던 것을 선심 쓰듯 내게 준 것이다. 마침 내 전기면도기도 오래 되어서 수염이 잘 깎이지 않는 터라 잘 되었다 싶어 군말없이 받아 왔다.
이틀 만 깎지 않아도 금세 수염이 거뭇하게 자라기에, 자주 면도하기가 귀찮아 전기면도기를 쓰곤 한다. 하지만, 면도크림을 발라 이중면도날이 붙은 면도기로 깎는 것 보다는 그다지 깔끔하지는 못하다. 정말 깨끗해야 하는 날에는 두날면도기를 사용한다.
자라면서 면도를 시작한다는 건 어른이 되어간다는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아들이 처음 면도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아마 고3 때였을 것이다.
일요일인데도 목욕탕은 한가했다. 아들이 중학생이었을 때까지 내 손으로 일일이 때를 밀어주었다. 그때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내 손을 벗어날 궁리만 했다. 그러던 아들이 이제는 부쩍 자라 나 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졌고, 허벅지는 내 것 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손발을 하나하나 잡고 때를 밀어주다가 힘이 달려서 등만 밀어주었다. 여리고 부드러웠던 살결에서 단단하고 거칠은 근육으로 바뀐 아들의 몸에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나 컸다니, 아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 혼자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때를 밀기 싫어 도망갈 궁리만 하던 모습은 어딜 가고, 오히려 더 밀어달라고 넓은 등판을 내밀고 있었다.
"야, 이 놈아. 팔 아파 죽겠다. 적당히 밀어라."
이젠 내가 꽁무니를 빼야할 판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막무가내로 내게 제 등짝을 들이밀었다. 하는 수없이 다시 때밀이 수건을 들었다. 아들은 하나도 시원하지 않다고, 더 세게 밀라고 잔소리를 했다.
나는 대충 밀어버리고는 "이제 네가 해라"며 돌아앉아 힘 빠진 팔을 주물렀다. 아들이 힘자랑이라도 하듯이 내 등을 빡빡 밀었다. 얼마나 세게 미는지 등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른 체면에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꾹 참다가 결국 때밀이 수건을 빼앗아 버렸다. 등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들은 때를 다 밀었는지 손가방을 뒤져 일회용 면도기를 찾았다. 전에는 내 것만 샀었는데, 요즘은 두 개를 산다. 아직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코 밑이 거뭇거뭇할 만큼 수염이 나기는 나는 모양이었다. 지난 번 목욕을 왔을 때 내 손가락을 제 코 밑에 갖다대며 수염 났다고 자랑스레 말했었다. 아직은 가늘고 부드러운 수염이었다. 자꾸 면도를 하면 점점 수염이 더 많이 난다며 아직은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아들은 기어이 제 면도기까지 샀다.
얼마 전에는 아들이 내가 쓰는 전기면도기를 달라고 했다. 제 방에서 한참 동안 윙윙거리다가 잘 깎이지 않는다며 일회용 면도기로 어떻게 면도를 하느냐고 물어왔다. 벌써 아들이 면도기를 쓸 때가 되었나? 이제 어른 흉내를 내고싶어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귀엽던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서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면도를 하는 모습을 본 나의 아버지도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조용히 면도를 하던 아들이 갑자기 "아!" 하며 짧은 신음을 토했다. 면도날에 베인 것이다. 옆을 지나치던 사람과 면도기를 쥐고 있던 팔이 부딪치고 말았다. 아주 조금 피가 나기는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들은 면도날에 베인 것에 짜증이 나서 연신 "에이, 에이" 하면서 부딪친 것도 모르고 사우나실로 들어간 남자를 탓했다. 아직은 면도하는 게 서투를 수 밖에 없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툴툴거리는 아들을 보며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목욕을 끝내고 소지품을 챙기는데 아들이 자기가 썼던 면도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몇 번 더 쓸 수 있는데 왜 버리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일회용이 아니냐고, 한번 썼으면 버려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말이 일회용이지 어떻게 한번만 쓰냐고, 빨리 꺼내라고 했지만 아들은 그냥 가자며 내 팔을 끌었다. 나는 일회용 면도기를 서너 번 이상, 아니 수염만 깎인다면 대여섯 번도 더 쓴다.
나도 처음에 내 아버지가 일회용 면도기를 날에 녹이 슬 때 까지 쓰시는 것을 보고 지금의 아들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가고 내 아버지처럼 나이가 들고나니 일회용 면도기를 한번만 쓰고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회용이라도 아직 면도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한 번만 쓰고 버린다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생각이 내게로 전해졌나 보다. 아들도 일회용을 다회용으로 쓰게 될 날이 곧 오겠지. 그러면 아들은 부쩍 더 자라있겠지.
목욕탕을 나오니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벼워졌다. 아들은 면도할 때 베인 코 밑에 신경이 쓰였는지 자꾸만 코 밑에 손을 대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비록 피를 보긴 했지만 직접 면도를 했다는 것에 가슴이 뿌듯한 모양이었다. 점점 수염이 많아지고 면도도 자주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말끔하게 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겠지.
면도를 한다는 것은 드디어 남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제 면도를 할 때가 되었음을 인정받고,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에게 면도는 어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내 옆을 걷고있는 아들에게서 나는 스킨로숀 향기가 마치 설익은 과일향처럼 풋풋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아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경기도로 독립해 떠났다. 가끔 내려올 때면 함께 목욕탕에 가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가기도 힘들어지고 말았다.
빨리 코로나19가 사라지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삶에 찌들어 묵은 때를 밀어주고, 근심걱정의 싹처럼 자라나는 수염을 면도기로 말끔히 깎아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