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 진 Sep 30. 2021

[동화]  항아리에 담긴 물

나의 창작동화


                              항아리에 담긴 물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습니다. 담벼락에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와 못 쓰는 가재도구들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살금살금 다가왔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양 손에 장갑을 낀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버려진 가재도구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작은 의자와 꼭지가 떨어진 주전자를 챙겨갔습니다. 


  얼마 후, 리어카를 끌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종이며 다른 가재도구들을 몽땅 실어갔습니다. 


  이제 담벼락 밑에는 쓰레기 봉지와 항아리 하나가 남았습니다. 하지만 쓰레기 봉지마저 청소차가 와서 가져가 버리자 항아리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둥글넙적한 항아리는 주둥이 한쪽이 깨어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혹시나 먹을 게 있는지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고는  아무 것도 없자 빨간 혀를 낼름 내밀고는 재빠르게 사라졌습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도 깨어진 항아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오후가 되자 담벼락의 그림자가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몹시도 지친 모양입니다. 아마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강아지는 항아리를 보고는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먹을 것이 있는지 항아리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시무룩하게 풀이 죽은 강아지는 힘 없이 항아리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길거리를 떠돌아 다닌지 오래 되었나 봅니다.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더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쪽 눈도 반쯤 감겨져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혀를 길게 빼고 입가에 흐르는 침을 핥았습니다. 


  한 소녀가 골목 안으로 후다닥 뛰어왔습니다. 담벼락 닡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강아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강아지도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소녀를 보고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소녀도 강아지를 보고 멈칫 제자리에 섰습니다. 


  강아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소녀를 노려보았습니다. 자기만 보면 돌멩이를 던지던 아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강아지의 흉한 모습과 금세라도 달려들 듯이 으르릉거리는 소리와 매서운 눈빛에 놀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습니다. 소녀는 무서운 생각에 도망도 가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마침 뒤에서 오던 아저씨가 이 모습을 보고 발로 차는 시늉으로 강아지를 쫓아버렸습니다. 강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꼬리를 내리며 도망갔습니다. 소녀는 그제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담벼락 밑의 항아리 위에도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빗물이조금씩 조금씩 고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까치가 날아와 항아리에 담긴 빗물을 마시고 갔습니다. 점심 때는 고양이가 하품을 하며 다가오더니 고인 빗물을 홀짝거리며 마셨습니다. 골목을 지나가던 꼬마가 과자 껍데기를 항아리에 버리고 갔습니다. 껍데기는 항아리 속의 고인 물 위에 둥둥 떠 다녔습니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늦은 오후에 강아지가 절룩거리며 다가왔습니다. 강아지는 항아리 속의 빗물을 '쩝쩝.' 크게 소리가 나도록 마셨습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있는 강아지를 숨어서 쳐다보는 눈이 하나 있었습니다. 골목 어귀에서 고개만 빼꼼ㅣ 내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어제 보았던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고, 한쪽 눈도 감기고, 털도 군데군데 빠져 보기에도  흉한 강아지가 처음에는 무서웠습니다.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강아지가 물을 다 마시고 사라진 뒤에야 골목으로 들어왔습니다. 소녀의 걱정스러웠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소녀는 깨갱거리며 골목 밖으로 도망가는 강아지를 보았습니다. 빗자루를 든 옆 집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뒤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도망쳤습니다. 불쌍한 강아지를 때리려는 아주머니가 미워졌습니다. 소녀는 골목 밖을 바라보며 아무 잘못도 없이 쫓겨간 강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소녀는 강아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는 자주 대문 밖을 내다보며 혹시라도 강아지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강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강아지가 아무도 없는 밤에만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졸리는 눈을 비비며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좀체 강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교를 하던 소녀가 담벼락 밑에 놓여있는 항아리를 보자 또 강아지 생각이 났습니다. 소녀는 항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습니다. 먼지가 쌓인 항아리는 더러웠습니다. 항아리를 보던 소녀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자기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물은 없고 과자 껍데기만 귀퉁이에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강아지가 마셨던 빗물은 이제 다 말라버리고 비어있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기 때문에 강아지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녀는 다시 자기 집으로 달려들어가 바가지에 물을 담아와서 항아리에다 부었습니다. 물은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이제 강아지가 다시 올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소녀는 학교에 가려다 다시 섰습니다.  


  "학교에 간 사이에 강아지가 오면 어떡하지?"


  항아리를 보고있던 소녀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밝은 표정으로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아까부터 골목 끝에서 머리 하나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 머리의 주인은 소녀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소녀는 골목 어귀에 숨어 강아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날아와 물을 마시고 갔고, 고양이도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항아리의 물을 마시고 갔지만, 아직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학원에 가는 것도 빼먹고 강아지를 보기 위해 일찍 집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소녀는 한참을 기다리다 다리도 아프고, 지루하기도 해서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때, 골목 저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다리던 강아지였습니다. 강아지는 여전히 더럽고 흉한 모습이었지만 소녀는 반가운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강아지는 항아리의 고개를 쳐박고 물을 오랫동안 마셨습니다. 소녀는 기뻤습니다. 자기가 떠다 놓은 물을 달게 마시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강아지가 물을 마시고 있는 동안 제발 골목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 순간, 옆집 아주머니가 대문을 '덜컹!' 소리를 내며 열었습니다. 강아지는 갑자기 나타난 아주머니를 보고 놀라서 재빨리 골목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골목 끝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물을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쫓겨간 강아지가 불쌍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밤중에 와서 물을 마시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튿날, 집으로 오던 소녀가 골목을 청소하고 있는 엽집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인사를 하다가 담벼락 밑에 놓여있어야할 항아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소녀는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여기 있던 항아리 못 보셨어요?"


  아주머니는 담벼락 밑에 놓여져 있는 쓰레기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누가 발로 찼는지 항아리가 박살이 나 있더구나. 그래서 내가 저기 저 봉투에 쓸어담았어."


  소녀는 쓰레기 봉투에 들어있는 항아리 조각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주머니는 소녀의 눈에 맺혀있는 작은 이슬방울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소녀는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강아지가 물을 마시러 왔다가 헛걸음하고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밤하늘의 달님도, 별님도 소녀와 함께 턱을 괴고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왓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달님도 하품을 하며 자러가고, 반짝이던 별님들도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소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까치가 날아와 자기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까치를 그렸습니다. 까치는 붓을 씻는 물통의 물을 마시고는 '깍깍'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날아갔습니다.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자기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햇빛이 잘 드는 마루에서 잠 자는 고양이를 그려주었습니다. 고양이는 '야옹 야옹'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까치가 그랬던 것처럼 물통의 물을 마시고 갔습니다. 


  이번에는 강아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보았던 흉하고 더러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리도 멀쩡하고 눈도 초롱하고 털도 윤기가 나서 아주 잘 생겨보였습니다. 강아지도 소녀에게 자기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개 집을 멋있게 그리고 그 앞에서 밥을 맛있게 먹고있는 강아지를 그려주었습니다. 강아지는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멍멍' 짖었습니다. 강아지도 물통의 물을 마시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물통에 물이 모두 다 없어진 것을 보고 물을 떠 오기위해 수돗가로 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소녀가 그린 그림을 하늘로 날렸습니다. 까치 그림도, 고양이 그림도, 강아지 그림도 소녀의 머리 위에서 훨훨 날더니 구름처럼 높이 날아가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녀는 물이 담긴 물통을 들고나와 자기 집 대문 옆에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물통 옆에다 빵을 조각내어 함께 놓았습니다. 소녀는 물통을 내려다보다가 생각이 난 듯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소녀는 그 종이를 물그릇이 놓인 담벼락에다 풀로 붙였습니다.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엽집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담벼락밑에 놓인 물통과 빵조각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종이에는 빨간 크레용으로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이 물통은 길거리의 친구들을 위해 놓아둔 것이니 손대지 마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동화] 붕어 한 마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