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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Oct 13. 2021

[동화] 별을 품은 흙

나의 창작동화


               별을 품은 흙



  아침 햇살이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햇살은 따스하고 눈부신 빛을 베란다에 줄지어 늘어선 화분들 위에 쏟아부었습니다. 화초들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습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베란다에 들어와 화분들마다 물을 주었습니다. 하나하나씩 물을 주던 할머니가 구석에 놓인 화분 앞에서 우뚝 물 주기를 멈추었습니다.


  "이 화분은 더 이상 물을 줄 필요가 없겠네. 꽃씨가 시원찮았나 보네. 다른 화분에는 다 싹이 나 떡잎이 많이 자랐는데. 쯧쯧."


  할머니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흙만 덩그러니 담겨 있는 작은 화분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다른 화분들에서는 모두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있는데 오직 하나의 화분에서만은 싹이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싹이 나지 않는 화분을 베란다 구석으로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화분에 마저 물을 주고 거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쟤는 싹을 키울 능력이 없나 봐."

  "그러게 말이야, 흙이라면 씨앗을 품고 싹을 키울 줄 알아야 되는데."

  "정말 할머니 말대로 씨앗이 나빴나 봐. 운이 없는 흙이야. 쯧쯧, 안됐어."


  화분에 담긴 흙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구석에 떨어져 있는 화분의 흙은 슬펐습니다. 흙은 품속에 간직하고 있는 씨앗을 들여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왜 다른 흙들처럼 싹을 틔울 수가 없는 건지, 정말 자기 재주가 부족한 건지, 아니면 운이 나빠서 불량씨앗을 품어서 그랬는지, 흙은 이젠 물도 주지 않는 할머니가 서운해졌습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할머니는 싹이 나지 않은 화분에는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점점 흙은 메말라 갔습니다. 흙은 목이 말라 할머니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다른 화분들의 흙에만 물을 줄 뿐이었습니다. 흙은 생명을 키우고 있는 다른 화분들의 흙을 부러운 눈길로 하루 종일 쳐다보며 지내야 했습니다. 흙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아파트 베란다로 올라올 때가 생각났습니다. 흙은 아파트 화단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비록 잡초였지만 흙은 생명을 키우고 지냈습니다. 


  비가 오면 그 비를 받아서 잡초에게 먹였습니다. 간혹 고양이나 강아지들이 와서 똥을 누고 가는 날이면 코를 싸잡아야 했습니다. 그럴 때는 화단 가운데 있는 흙이 부러웠습니다. 아름다운 꽃나무를 키우고 있는 흙도 있는데 자기는 귀퉁이에서 고작 잡초나 키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웬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작은 화분에다 흙을 퍼 담았습니다. 그때, 흙은 자기도 이제 화분에 담겨 예쁜 화초를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아파트로 올라온 할머니는 화분에 담긴 흙속에다 작은 꽃씨를 심었습니다. 흙은 소중히 씨앗을 품고 어서 싹이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화분에는 싹이 하나 둘 나는데 자기의 품속에 있는 씨앗만은 싹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씨앗은 싹을 틔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흙은 차라리 화단의 귀퉁이에서 비록 잡초를 키우고 있었지만 그때가 그리워졌습니다. 흙은 하루 종일 한숨만 쉬며 지내야 했습니다. 


  흙은 비가 오는 날이면 창밖을 내다보며 애끓는 가슴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밤이 되면 흙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달님에게 빌었습니다. 자기를 다시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님에게 빌어봐도 흙은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아아,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 다른 흙들처럼 생명을 키워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버려져 있어야 하다니.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흙이야."


  흙이 지쳐 쓰러져 있는데 머리 위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흙아, 흙아. 기운을 내. 너도 언젠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흙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작은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흙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별빛이 참 곱구나. 나도 저 별처럼 곱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었는데."


  흙은 작은 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매일같이 물을 주던 할머니가 오늘은 해 질 녘이 되도록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한낮의 더위에 목말라하던 화초들이 목을 빼고 할머니를 기다렸지만 할머니는 저녁이 되어서도 물을 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구석에 버려진 화분의 흙은 어차피 할머니가 와도 물을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오지 않으니 궁금해졌습니다. 


  흙은 거실의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멀리 볼일이라도 보러 갔나 봅니다. 아파트에는 다른 식구들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모두들 바쁜지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음날 점심때였습니다.. 할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란다의 화분들은 어서 할머니가 물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토해내기도 했습니다. 


  흙은 할머니가 왜 그러고 앉아 있는지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서 할머니가 베란다로 들어와 시들어 가는 화초들에게 물을 주기를 기다렸지만 할머니는 쉽사리 베란다로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흙은 생각했습니다. 하루도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할머니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밤이 되어서야 베란다로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눈두덩은 많이 울어서 그런지 약간 부어 있었습니다. 흙은 분명 할머니에게 슬픈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란다로 들어온 할머니는 시들어 가는 화초들에게 물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 그냥 물끄러미 화분들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화초들이 핀 화분들을 둘러보던 할머니는 한쪽 구석에 버려진 화분을 쳐다보았습니다. 흙은 자기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슬픈 눈망울을 마주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흙은 평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할머니가 지금 자기를 그렇게나 오래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눈을 돌렸습니다. 한참 동안 흙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일어서더니 거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베란다에 다시 나타난 할머니의 손에는 신문지 한 장과 채, 작은 유리병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베란다에 신문지를 깔고 구석에 버려져 있던 화분의 흙을 꺼내 채로 쳤습니다. 흙은 할머니가 흔들어대는 채 위에서 온 몸이 흔들려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몇 번의 흔들림이 있고 난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보드라운 흙이 되어 신문지 위에 쌓여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곱게 쳐진 흙을 가져온 유리병에 손으로 정성스럽게 쓸어 담았습니다. 그리고는 뚜껑을 닫았습니다. 흙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숨 막힘은 가라앉았습니다. 


  할머니는 흙이 든 작은 유리병을 들어 보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흙은 왜 할머니가 자기를 채로 쳐서 유리병에 넣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할머니의 미소를 보고는 약간 안심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흙은 결린 몸을 뒤틀며 눈을 떴습니다. 흙은 여전히 유리병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흙을 감싸고 있는 어두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지나야 이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지 흙은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흙이 담긴 작은 유리병 옆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흙은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두운 종이상자에 들어온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흙은 자기가 담긴 유리병을 앞에 놓고 엎드려 편지를 쓰던 할머니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흙은 이상한 말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소리였습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흙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참 후에는 딩동 하는 벨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조금 뒤, 흙은 갑자기 들어온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종이상자를 누군가 열었나 봅니다. 


  흙은 눈부심이 가신 뒤에 가늘게 눈을 떠 보았습니다. 흙의 눈앞에 커다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흙은 덥수룩하고 시커먼 털보 아저씨의 수염에 화들짝 놀라 눈을 감았습니다.


  "이게 한국에서 이모님이 보내신 흙이란 말이지?"


  흙은 낮고 굵직한 아저씨의 음성을 듣고 다시 눈을 살며시 떴습니다. 아저씨는 신기한 눈으로 흙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흙이 담긴 유리병과 함께 종이상자에 들어있던 편지를 꺼내 읽고 있었습니다. 흙은 아저씨가 읽고 있는 편지를 넘겨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저씨는 유리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머리카락이 하얗고 얼굴에 주름살이 많은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할머니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 흙은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한국에 계신 이모님께서 흙을 보내오셨어요. 여기 이렇게 말입니다."


  털보 아저씨는 자리에 누워 있는 할머니의 손에다 유리병을 쥐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유리병을 들어 흙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흙을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어머니, 힘을 내어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할머니는 유리병을 품에다 살짝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손자와 손녀가 있었지만 할머니와 아이들은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흙도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말은 할머니도 알아듣지 못했고, 아이들도 할머니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할머니와 말이 통하는 할머니의 아들인 털보 아저씨와 며느리는 일을 하느라 밤늦게야 들어왔기 때문에 대화를 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혼자 지내면서 흙이 담긴 유리병을 항상 가까이 두었습니다. 흙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기도 하고, 종이를 깔고 흙을 쏟아 놓고 어린아이처럼 흙장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흙을 매만지기도 하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냄새를 맡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흙을 보고 만질 때마다 고향에 온 것처럼 즐거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할머니는 흙을 만지며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고향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흙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밝아졌습니다. 흙도 할머니가 자신을 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비록 유리병에 담겨 생명을 키울 수는 없지만 멀리 남의 나라에서 외롭게 지내는 할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없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흙은 하루 종일 할머니와 함께 놀다가 할머니가 잠자리에 들면 비로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면 할머니가 흙보다 먼저 일어나 흙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흙은 이제 할머니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흙이 미국에 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역시 할머니는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더 이상 할머니는 흙과 놀아주지도 못했습니다. 흙은 할머니의 머리맡에서 조용히 지켜볼 뿐, 할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언제나 흙을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눈은 점점 힘이 없어져 갔습니다. 털보 아저씨가 의사를 데려 왔습니다. 할머니를 진찰한 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이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흙은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풀이 죽은 흙이 잠자는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문득 할머니가 항상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흙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흙이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고향의 노래였습니다. 흙은 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더니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흙의 노래를 들었는지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떴습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흙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조용하던 방 안에 흙과 할머니의 노래가 흘렀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작고 예쁜 소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고향의 뒷동산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노랑나비, 흰나비가 소녀를 따라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풀밭에 누워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꽃들도, 나무들도, 흰 구름도, 풀들도 모두 소녀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가 모두 끝났을 때 할머니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흙을 할머니의 무덤 위에 솔솔 뿌렸습니다. 흙은 온몸을 활짝 펼치고 할머니를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흙은 매일같이 자기의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위해 고향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이 되면 작은 별이 찾아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도 흙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무덤가에는 항상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의 무덤 앞에 별을 닮은 꽃이 한 송이 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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