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 진 Apr 20. 2022

[연재 동화]  산지니, 다시 하늘로...... 1편

둥지에 쏟아지는 소나기


                    < 1 >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맑게 갠 하늘에서 해가 쑥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두둥실 떠가던 흰 구름 한 조각이 강물 위에 내려와 찰랑찰랑 물장구를 쳤다. 강변에서는 키 큰 갈대들이 강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치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듯 바람이 갈대들을 휘젓고 다녔다. 간간이 작은 새들이 포르릉 포르릉 갈대밭 위를 날아갔다.


  오리 두 마리가 장난스럽게 물장구를 치다가 물 위에 비친 검은 그림자를 보고 놀라 후다닥 밖으로 헤엄쳐 달아났다. 하늘에서는 흑갈색 매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아래를 천천히 굽어보며 날았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오리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그들 머리 위로 방향을 바꾸었다. 무서운 매가 자기들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꽁지가 빠져라 뒤뚱뒤뚱 도망가다가 급기야 갈대밭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늘로 향해 쳐 들려진 하얀 꽁지 털이 달달달 떨렸다.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매는 피식 웃어버렸다. 매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갈대밭 위를 한 바퀴 크게 돌고 강 건너편 산 너머로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이리저리 숲을 살피며 산길을 올라갔다. 좁다란 오솔길에는 가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들국화가 동글동글 웃으며 피어 있었다. 

  "할아버지, 좀 쉬었다 가요. 어휴, 숨 차라."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소년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쉬었다 가자꾸나. 오늘은 올무가 별로 없네."

  할아버지는 등에 짊어진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숲에서 거두어들인 올무들이 들어 있었다. 


  올무는 사냥꾼이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을 잡으려고 몰래 길목에다 설치해놓은 덫이다. 그 때문에 많은 짐승이 올무에 걸려 죽어갔다. 할아버지와 소년은 가끔 산에 올라와 올무들을 없애버리곤 했지만, 며칠 못 가서 더 많은 올무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할아버지, 사람들은 왜 야생동물들을 잡으려고 해요?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아마 야생동물들이 몸에 좋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 잡아먹으려고 하니 참 한심한 일이지. 짐승이든 사람이든 모두 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말이야."


  소년은 서울로 간 엄마가 생각났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빠가 끝내 돌아가시자 소년을 시골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돈을 벌러 떠났다. 할아버지는 닭과 오리를 키우고, 집 가까이에 작은 텃밭에 채소를 가꾸었다. 소년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강변에 나가서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바라보거나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광경을 넋 놓고 구경했다. 


  '탕!' 하고 총소리가 온산을 울렸다. 꿩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푸른 하늘로 치솟아 날아갔다. 긴 꼬리가 예쁜 장끼였다. 수꿩의 이름이 '장끼', 암꿩은 '까투리'라고 일전에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다. 다시 한번 '탕!' 하고 총소리가 났지만, 꿩은 총을 맞지 않았는지 그대로 날아갔다.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파악!' 하고 공기를 가르며 나타난 검은 물체가 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어느새 꿩의 몸뚱이를 움켜쥔 매 한 마리가 먼 하늘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송골매로군. 오랜만에 보는 놈이야."

  할아버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새 이름이 송골맨가요?" 

  "저건 매인데, 야생으로 사는 매를 송골매라고 하지.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매를 길들여서 사냥용으로 이용한 적이 있었지. 사람들에게 길든 매를 보라매라고 부르지. 덩치를 보니 나이가 한 살 정도 되었겠구나. 송골매는 산지니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아마 가까운 암벽에다 둥지를 트고 있을지 모르겠다."


  소년은 멀리 날아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된 매의 힘찬 날갯짓을 떠올리며 속으로 '송골매' '산지니'란 이름을 되새겨보았다.


  산지니란 매가 석양의 붉은빛을 받으며 둥지로 돌아왔다. 바위들로 이루어진 절벽 위에 얼기설기 나뭇가지로 지어진 둥지가 있었다. 암컷 매 한 마리가 날개를 펑퍼짐하게 펼친 자세로 온 둥지를 덮고 앉아 있었다. 산지니는 암컷의 눈앞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날개를 파닥거리며 허공에 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에 이미 숨이 끊어진 장끼는 긴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죽어 있었다. 


  "여보, 배고프지? 내가 우리 아기들을 품을 테니 어서 먹어요."

  산지니가 둥지 옆에다 잡아온 꿩을 내려놓고 암컷을 대신해 둥지 위에 가만히 올라앉았다. 따스한 알 두 개가 가슴에 닿았다. 마치 알 속에서 새끼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귀여운 새끼들이 태어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산지니의 심장도 두근두근 뛰었다. 자기가 잡아온 꿩을 맛있게 먹는 암컷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물오물 먹이를 먹던 암컷도 마주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저녁노을이 산지니 가족이 사는 둥지를 붉게 물들여 따스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가을바람이 갈대밭을 스치고 지나면서 황금빛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초록빛 강변은 삽시간에 누렇게 변해갔다.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들의 노랫소리도 점점 커졌다. 해가 떠오르자 갈대들이 밤새 이슬에 젖은 몸을 말리며 부스스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다. 종달새가 늦잠 자는 이웃을 깨우느라 바쁜 날갯짓으로 날아다니며 재잘거리고, 들쥐들도 아침부터 이리저리 쏘다니기에 정신없었다. 


  갈대밭 작은 언덕에서는 물뱀 한 마리가 일찌감치 개구리를 잡아 아침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오리들은 강가로 나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느라 연방 둥그런 주둥이로 낚시질을 했다. 밤새 조용했던 강변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활기찬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


  산지니가 먹잇감을 찾느라 아까부터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새끼에게 먹여야 하니 좀 더 부드러운 먹이를 고르느라 눈을 부릅뜨고 갈대밭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마침 살찐 들쥐 한 마리가 강변 모래톱에서 죽어있는 새를 뜯어먹는 게 보였다. 눈을 반짝 빛내더니 순식간에 펼쳐졌던 날개를 오므리며 들쥐를 향해 전속력으로 자신의 몸을 내리꽂았다. 들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죽은 새를 먹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쳐들었다. '아!'하고 들쥐의 눈이 커다랗게 커지며 입이 절로 벌어졌다. 주둥이에 물려 있던 새의 살점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들쥐의 몸은 온 데 간 데 없이 모래톱에서 사라졌다. 통통한 들쥐는 멀리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산지니의 매서운 발톱에 숨이 끊어진 채 꼬리를 대롱대롱 늘어뜨리고 있었다.


  산지니는 들쥐를 새끼들에게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강변을 한번 돌고는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날아가는데 먼 하늘에서 새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차츰차츰 가까이 들려오더니 작은 점들이 가을의 높고 푸른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수만 마리나 될 법한 철새들이 강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온몸이 짙은 갈색인 가창오리들이었다. 꽥꽥거리는 오리들의 울음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가창오리들은 갈대밭이며 강물에 무리를 지어 사뿐히 내려앉았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찾아오는 철새였다. 산지니는 내년 봄까지는 시끄러운 새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새끼들은 많이 자라서 들쥐의 살점을 잘도 받아먹었다. 암컷은 잘 먹는 새끼들을 바라보다가 토끼라도 한 마리 더 잡아오겠다며 숲으로 날아갔다. 산지니는 산에 사냥꾼들이 자주 나타나니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암컷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새끼들은 들쥐를 다 먹고 나서도 더 달라고 입을 벌렸다. 산지니는 암컷이 날아간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탕!'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산지니의 가슴이 부르르 떨려왔다. '번쩍!'하고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더니 천둥소리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왔다. 산지니는 둥지를 박차고 암컷이 간 곳으로 날아갔다. 머리 위에서는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 아래로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사냥꾼이 보였다. 허리춤에는 조금 전까지 둥지에서 함께 새끼를 돌보던 암컷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은 채로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산지니는 소리를 치며 사냥꾼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비를 맞은 날개가 무거워 날갯짓하기가 점점 더 힘들었다. 하지만, 자기의 암컷을 두고 가기를 바라며 산길을 내려가는 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사냥꾼이 자꾸만 따라오는 매가 귀찮다는 듯이 총을 들었다. 산지니는 총부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둥지에 남아 있는 새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돌려 재빨리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산지니는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멀리 사라져 가는 암컷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비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더 세차게 내렸다. 암컷을 잃은 산지니는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화]  몽이를 모르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