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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May 03. 2022

리본을 두른 숯

눈 부신 5월이 돌아오면...


                    리본을 두른 숯   



  거실 한 구석에 시커멓고 커다란 숯덩이 하나가 놓였다. 아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참숯이다. 내 종아리만큼이나 굵고 길다. 더구나 윗부분에는 분홍색 리본까지 예쁘게 두르고 있다. 세상에! 손 끝만 스쳐도 금세 까맣게 검정이 묻어날까 싶어 손가락이 절로 오므라들 정도다. 숯이 돼지갈비 굽는 식당에서나 쓰이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우리 집 거실에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걸까.


  아내는 숯에서 자꾸만 멀찍이 떨어지려는 나를 붙들고 어린아이 가르치듯 설명한다. 숯은 집 안의 습기를 제거하고, 나쁜 냄새를 없애준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혹여 옷에 숯검정이 묻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말했지만, 아내는 무조건 조심하란다. 딸도 옆에서 함께 거드는 바람에 입만 쩝쩝 다셨다. 


  숯은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진다. 공기를 차단한 숯가마에서 뜨거운 불에 가열되어서 가볍고 화력 좋은 연료가 된다. 불에 타기는 탔으되 마지막 불꽃을 피울 여분을 남겨두었다. 요즘은 건강 찜질을 하러 숯가마를 찾는 이도 많은 걸 보면, 숯이 우리 몸에 좋은 건 분명하다. 


  식당에서 갈빗살이나 삼겹살을 구울 때 숯불을 피우곤 한다. 벌겋게 타오르는 숯덩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미처 불사르지 못한 생에 대한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는 거 같아서 황홀한 눈길로 바라본 적도 있었다. 숯에서 꿈틀꿈틀 일렁이는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뜨겁게 불태우려는 안간힘으로 다가오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우리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걱정과 고민에 빠진다. 오랫동안 답답하게 애를 태우다 보면 가슴속이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탄다. 그렇게 하나, 둘씩 쌓인 숯덩이가 세월이 흘러 점점 많아지게 된다. 몸도 정신도 숯처럼 바싹 말라버려서  작은 불씨에도 금방 화르르 불이 붙어버린다. 숯에 옮겨 붙은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을 소멸시키고 만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불태우고 말았다. 숯덩이처럼 까맣게 가슴을 태우다가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바싹 마른 가슴에 불을 붙여버린 것이다.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숯처럼 검고 어두운 빛만 눈에 가득 들어왔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을 불태워 밝은 빛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자기를 따라다니던 어둠을 저주하면서 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볼링장이었다. 같은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나이가 동갑인 우리는 쉽게 친해졌다. 아직 미혼인 그는 팔순 노모의 걱정스러운 자식이었다. 중년이 넘도록 그는 인생의 동반자를 찾지 못했다. 클럽 총무를 맡아 궂은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항상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회원 간의 축축해진 습기를 몰아내기도 했고, 오래된 조직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올 때면 분위기를 바꾸어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는 그저 참숯처럼 묵묵히 자기 역할만 하는 공기정화기 같은 존재였다. 


  볼링을 치고 나면 우리는 가끔 술을 마셨다. 숯불에 달궈진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돼지고기와 함께 쓰디쓴 수주를 마시고는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도 우리는 웃었다. 그의 웃음 속에 차마 말 못 할 사정이 까맣게 탄 숯덩이가 되어 쌓여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손목을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볼링을 치러 나가지 못했다. 간간히 그가 위로 전화를 해왔다. 하루빨리 나아 같이 볼링을 쳤으면 좋겠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 일인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 그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바도 있어 그렇거니 했다. 힘겨워하는 그의 곁에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이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  


  대지에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던 날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어버이날이 지난 새벽녘에 그는 세상에 수분을 다 빼앗겨 숯덩이처럼 바싹 말라버린 자신의 몸을 불태워 끝내 하얀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넋 나간 얼굴로 앉아있는 노모의 가슴에 그는 또 하나의 불타는 숯덩이를 올려놓고 너무도 야속하게 떠났다. 왜 그랬을까?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동료의식을 느꼈고,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함께 용기를 내면서 지내왔었는데......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 그는 이제 밝은 햇빛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더는 속 상하지 말고, 더는 힘들어하지 말고, 늘 웃는 얼굴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가 뿌려진 산 언덕에 앉아 마지막 소주잔을 들어 자연으로 돌아간 참숯 같은 그를 위해 건배를 했다. 어쩌면 지금 그는 공해에 찌든 자연을 정화시키느라 아마도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을 게다.     


  거실에 숯을 갖다 놓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공기가 깨끗해졌는지, 악취가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잔뜩 의문스러운 얼굴로 숯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어본다. 표면은 까칠까칠하게 여전히 건조한 느낌이다. 습기를 잡아먹기는 먹는 건지 겉으로 보아서는 모를 일이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빛도 흡수하고, 어둠도 끌어안는다. 검게 탄 숯은 삶과 죽음을 다 포용하고 있는 듯하다. 불에 탄 숯은 숨을 쉬고 있다는데 죽은 걸까? 아니면 살아있는 걸까? 숯의 윗부분에 둘러져있는 리본이 그가 늘 쓰고 다니던 모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냄새를 없애준다는 숯에서 이상하게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참나무 탄 내가 아니다. 아직도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그의 웃음 띤 향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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