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간들...
< 14 >
강변에는 겨울이 가고 새봄이 찾아왔다. 가창오리들이 떼를 지어 강물 위를 날았다. 누렇게 말라버린 갈대밭에도 땅을 뚫고 새싹이 올라왔다.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가 뱀에게 쫓겨 달아났다. 들쥐들도 부산스럽게 몰려다녔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도 진달래가 빨갛게 피었다.
아까부터 절벽 위에서 산지니와 노랑 부리가 공중을 빙빙 돌고 있었다. 산지니는 노랑 부리의 도움으로 겨우내 어렵지 않게 지냈다. 늘 함께 비행을 했다. 추운 날에는 몸을 맞대어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으로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다른 가창오리들이 그런 노랑 부리를 보며 도대체 무섭지도 않으냐고, 사나운 매가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며 함께 어울리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하지만, 노랑 부리는 고개를 흔들며 자기는 산지니를 믿는다고,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노랑 부리가 산지니는 정말 고마웠다. 아마 노랑 부리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산지니는 이제 제법 익숙하게 비행했다. 매일같이 노랑 부리와 함께 이리저리 날아다녀 산과 강변 주위를 지도를 보듯이 머릿속으로 환하게 그릴 수 있었다.
"여기에도 없는데?"
노랑 부리가 말했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둥지가 있을 텐데... 이상하네."
"혹시 새끼들을 누가 물어가고 둥지를 부수어버린 건 아닐까?"
산지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랑 부리가 괜스레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닐 거야. 이곳이 아닐지도 몰라. 다른 곳으로 가보자."
산지니는 노랑 부리의 도움으로 며칠째 온 절벽 주변을 뒤졌지만 새끼들이 있던 둥지를 찾지 못했다. 정말 새끼들이 뱀이나 올빼미에게 잡아먹힌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빨리 오라는 노랑 부리의 목소리를 따라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산지니는 노랑 부리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바람과 소리를 이용해 방향을 잡고, 냄새나 발바닥의 촉감을 느끼며 자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랑 부리를 따라다니면서 갈대밭 주변을 눈으로 보듯이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힘들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는 노랑 부리가 산지니에게는 둘도 없는 착하고 고마운 친구였다. 아마도 하느님이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갔다. 저녁부터 떠들어대던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도 점점 사그라져갔다. 풀벌레 소리들만 여기저기서 가만히 들려오고 있었다. 산지니는 곁에서 잠든 노랑 부리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 자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필 자기에게만 이런 불행이 닥친 걸까?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나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새끼를 위해 열심히 먹이를 잡아다 주고, 함부로 다른 동물들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왜 자기에게만 하늘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벌을 내린 걸까? 아 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쌔근쌔근 작게 코를 골며 잠자는 노랑 부리를 보며 산지니는 생각했다. 하늘이 지금 자기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봄이 무르익었다. 갈대밭에도 연두색 갈대들이 자라났고, 밤이면 개구리들이 합창을 했다. 겨울 철새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창오리들도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가려고 부지런히 먹이를 먹었다. 수만 킬로미터나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든든히 먹어두어야 했다.
노랑 부리는 고민에 빠졌다. 자기가 다른 오리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돌아간다면 산지니는 혼자서 어떻게 살겠는가? 혼자서는 날 수도 없고, 먹이도 제대로 구하지도 못하는데... 그렇다고, 자기만 혼자 남을 수도 없으니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고민에 빠져 전전긍긍하는 노랑 부리에게 산지니가 내내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도 함께 떠나라. 나 때문에 네가 남아있어서는 안 돼. 나도 이제 혼자서 잘할 수 있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른 오리들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해."
노랑 부리는 산지니를 바라보며 차라리 같은 가창오리였더라면 함께 시베리아로 갈 수 있을 텐데, 어딜 가더라도 늘 곁에서 챙겨주고 눈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매와 가창오리는 서로 사는 환경이 달랐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지낼 수 있겠어? 가을에 꼭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오소리를 조심하고. 알았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걱정스럽게 말하는 노랑 부리를 보며 산지니는 일부러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시베리아로 떠날 채비를 다 한 가창오리들은 강변 식구들에게 이별의 합창을 하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떼를 지어 강물 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갈대밭 위를 크게 한번 돌더니 날개를 휘저으며 멀리 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산지니는 하수구 옆에 서서 멀어져 가는 가창오리들 속에서 날고 있을 노랑 부리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먼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감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제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마음에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