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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May 20. 2022

[연재 동화]  산지니, 다시 하늘로... 16편

오소리의 죽음...


                    < 16 >  


  강변에는 키가 부쩍 자란 갈대들이 푸르게 물결쳤다. 날씨는 점점 더워졌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이면 모두 더위에 지쳐 그늘로 숨어들어갔다. 산기슭 좁다란 길로 오소리가 혀를 빼물고 힘없이 걸어갔다. 그 뒤에서 산지니가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따라갔다. 


  "휴우, 오늘도 사냥을 하지 못했으니 어쩌나? 아기들 배가 고플 텐데."

  오소리가 숨을 깊이 내쉬며 걱정스럽게 읊조렸다. 산지니는 며칠째 굶은 터라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동안 사냥꾼들 덕분에 편하게 먹이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무에 걸려 죽은 토끼도 요즘 들어 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올무를 많이 설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가 도둑질한다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도 몰랐다.


  "농가로 가보자.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먹이가 있으니까..."

  앞서 걷던 오소리가 큰 결심이라도 한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산지니는 예전에 소년의 집에 있던 닭장이 생각났다. 물론 그 안에는 많은 닭과 오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을 잡아먹을 수 있겠는가? 산지니가 그건 안 될 일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마. 네가 있었던 닭장에는 가지 않을 테니까..."

  "정말 거긴 안 가지?" 

  산지니는 자기를 구해준 할아버지와 도와주고 함께 지내게 해 준 닭과 오리들에게 갈 수는 없었다. 


  달도 별도 모두 잠들어 캄캄한 밤이었다. 오소리는 발걸음을 죽이며 농가로 다가갔다. 산지니는 오소리의 꼬리를 물고 따라갔다. 낮에 미리 확인해둔 개구멍으로 낮게 엎드려 마당으로 들어갔다. 

  "너는 여기에서 기다려. 내가 한 마리 물어올 테니."

  오소리가 낮게 속삭이고는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산지니는 누가 나타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스스로 깜짝 놀라 가슴을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비명이 들리더니 오소리가 축 늘어진 오리를 물고 나타났다. 

  "자, 일단 이거 들고 있어. 한 마리 더 잡아올 테니." 

  산지니는 피를 흘리며 죽은 오리를 받았다. 이미 죽었지만 체온이 채 가시지도 않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산지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가자. "

  오소리가 닭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다시 나타났다. 


  산지니와 오소리가 개구멍으로 가려는데 집 안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들켜버렸다. 오소리는 잽싸게 개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산지니는 미처 움직일 새도 없이 마당으로 달려 나온 사람이 비추는 플래시 불빛 속에 갇히고 말았다. 깜깜한 마당에서 피 묻은 오리를 들고 난처하게 서 있는 산지니가 무대의 조명을 받는 주인공처럼 보였다. 


  "야! 어서 도망가!"

  닭장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산지니는 그게 소년의 집에 있던 땅꼬마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오소리가 자기를 속이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였다. 


  산지니는 힘이 쭉 빠지고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몸 둘 바를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네 놈이 먹고살기가 많이 힘든가 보구나. 쯧쯧. 그래도 도둑질은 안 되지." 

  할아버지가 플래시 불빛을 거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긴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산지니는 깜깜한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어서 가라! 다시는 여기 오지 마!"

  땅꼬마의 슬픈 목소리가 마당에 가득 울려 퍼졌다. 산지니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파왔다.  


  개구멍을 빠져나온 산지니는 밖에서 숨어있던 오소리를 만났다. 

  "왜 오리는 물고 오지 않았어?"

  산지니는 오소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오소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랜만에 잡은 먹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갔다. 산지니는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걷기도 힘들었다.


  "아! 저게 뭐야? 아무것도 안 보여!" 

  넓은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오소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눈앞에 강한 불빛이 그들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였다. 차는 앞에서 주춤거리는 짐승들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지금 길 한복판에서 차의 전조등 불빛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는 산지니는 상관이 없었지만 오소리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밝은 빛을 보았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사르르 하고 차 유리문이 내려가더니 총구가 불쑥 나타났다. 산지니는 불길한 느낌에 날개를 펼치며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오소리를 보며 외쳤다.

  "어서 피해라!  위험해!"

  총구는 불빛 속에 남아있는 오소리를 겨냥했다. 그제야 오소리도 정신을 차려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탕!' 하고 총소리가 어두컴컴한 들판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산지니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숲을 헤치고 다녔다. 차가 그냥 간 것으로 보아 오소리는 총에 맞지 않고 무사히 달아난 게 분명했다. 어디선가 낮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산지니는 소리가 난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으으. 여기야. 헉헉. 제기랄, 피한다고 했는데 맞고 말았어."

  오소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총부리를 피해 달아나는 순간, 옆구리가 뜨거워졌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사냥꾼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숲 속으로 달아났다. 


  "괜찮아?"

  "헉헉... 총에 맞았는데 괜찮으면 안 되지. 으으... 아무래도..."

  오소리의 숨소리가 더욱 가빠졌다. 산지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부탁이 있어... 아무래도 나는 힘들 거 같아. 헉헉. 내 새끼들 말이야. 헉헉헉..." 

  산지니는 정말 오소리가 죽을 것 같았다. 오소리가 '새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내 새끼들은 어딨어?"


  오소리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우연히 절벽 가까이 갔다가 새끼가 흐느끼는 소릴 듣게 되었지. 헉헉헉. 네 새끼더군. 내가 가창오리를 잡아먹으려 할 때 훼방을 놓았던 네가 생각났어. 으으으. 어지러워..."

  산지니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래서!"   

  오소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힘겹게 이어갔다.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미안하다. 그때는 나도 새끼를 배고 있어서 먹이가 필요했어. 어쩔 수 없었다... 헉! 우욱! 퇘퇘!"

  오소리는 피를 울컥 한 모금 내뱉었다. 산지니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죽어가는 오소리를 노려보았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 갔어? "

  "그건 나도 몰라... 헉헉.  내가 갔을 땐 한 마리밖에 없었어. 웩!"

  오소리는 아까보다 더 많은 피를 토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축 늘어졌다. 

  "부탁이 하나 있어. 으으. 내가 죽으면 우리 새끼들 굶어 죽고 말 거야. 헉헉. 아직은 누가 먹이를 갖다 줘야 하는데... 헉헉헉."

  남의 새끼를 잡아먹은 놈이 감히 자기 새끼를 부탁하다니, 괘씸하기가 짝이 없었다. 부리로 콱 쪼아버려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죽으면 내 살점을 뜯어다... 헉헉헉... 우리 새끼들에게 먹여줘. 으으으. 부탁이야. 꼭  그렇게 한다고 약속해 줘... 우욱!"

  오소리는 피를 한 모금 쏟아내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소리가 죽었다.


  오소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산지니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아다녔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며 가시가 걸린 것처럼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밤하늘에는 그믐달이 죽은 오소리 앞에서 꼼짝 않고 앉아있는 산지니를 처량하게 내려다보았다.    


  산지니는 온몸에 힘을 뺀 채로 바람을 타고 날았다. 어젯밤에 죽은 오소리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새끼를 귀여워하던 오소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새끼들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죽은 어미보다 남은 새끼들이 가여워졌다. 산지니는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새끼가 생각나 가슴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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