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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Sep 05. 2020

엄마지만 남편, 아이 없이 여행 갑니다

가끔은 그런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여행

 관습과 통념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교복 입던 때부터 '결혼' 뒤에 '적령기'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고, 제도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장치일 뿐 그 틀에 나를 억지로 구겨 넣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일찌감치 결혼을 위한 결혼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내 삶의 중심에 나를 놓고, 스스로를 만족시키며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남편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엄마 소원인 인도 여행을 함께 성취하러 떠난 길. 경유지 태국에서 스노클링 투어에 참가했다. 첫눈에 봐도 훈훈함을 자아내는 총각이 레이더망에 왈칵 걸려들었다. 호감형 인상, 예의 바른 태도, 상큼한 눈웃음!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반한 다음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그는 일본인이었고, 열네 살이 많았다. 헉! 그러나 어찌하리. 이미 반한 것을.


 나는 눈웃음 상큼이에게 정면으로 돌진해 연락처를 묻고 데이트를 신청했다. 상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외쳤다. 첫 데이트는 곧 연애로 이어졌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국제연애에 겁도 없이 뛰어든 것이다.

 장거리 연애란 걸 해보니 사상누각이 따로 없었다. 서로가 살고 있는 기반을 통일하고, 함께 디딜 땅을 단단하게 다지지 않으면 관계를 아무리 오래 이어간다 한들 모래 위에 짓는 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 해서 연애를 관둘 수도 없었다. 거리를 핑계로 헤어지기엔 아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만나본 남자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모국어가 다른데도 그는 내가 개떡같이 하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말속에서 언제나 알맹이를 찾아냈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라 해도 대화를 하다 보면 말을 잇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오히려 말문을 열게 했다. 나 역시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그거야!"하는 공감이 차올랐다.

 마음 속으로 모래 집을 몇 번이나 짓고 허물며 더욱 선명해졌다. 국적과 거리, 나이라는 껍데기에 감추어진 그의 진짜 면모가.


 2년 6개월간 쉴 새 없이 비행기를 타고 양국을 오간 끝에 우리는 서로의 배우자가 되기로 했다. 제도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외국인이라 해도 법적 배우자에겐 거주비자가 주어지기에, 그토록 마땅찮던 '제도'의 덕을 봐야 했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나라인 일본에 정착했고, 나이 스물일곱에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아내가 되어도 엄마가 되어도 나는 나

 내 결혼은 이전 세대와 다르기를 바랐다. 결혼했단 이유로 좋아하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이 '시뽀'를 낳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이자, 엄마이자, 동시에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흔히 일본 남자는 보수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부모님 교육 때문인지, 원래 가치관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기혼녀'라는 단어에 가두고 쥐락펴락하지 않았다.

 역할 구분 없이 일과 가사, 육아를 나누어 했고, 내가 "올해 여행으론 인도를 갈까, 뉴욕을 갈까"를 고민하면 "서른의 여행과 마흔의 여행은 달라. 생각이 말랑말랑 할 때 많이 가 두는 것이 좋아. 아이는 내가 잘 보고 있을 테니 인도와 뉴욕 모두 다녀와." 하며 등을 떠미는 큰오빠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 없이 여행 다니는 것이 쉬웠으랴. 배우자의 동의보다 더 높은 벽인 세간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결혼했으면 집에 좀 있어라."

 "기혼인데 책임감 없는 거 아냐?"

 "남편 밥 어떡하니."

 "아이가 좀 불쌍하다."

 "아이 정서에 문제 생기면 어떡하려고." 등등.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배우자가 공감하지도 못하는, 장난스러운 조언을 가장한 폭력이 우르르 쏟아졌다.




편견을 배려하기 위해 숨죽이지 않기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만약, 그런 조언에 휘둘려 육아에만 전념했다면 이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여행 좋아하더니 결혼하니까 아무 데도 못 가네. 안됐다. 자기 인생도 좀 살아."


 이런 말을 피하려 아이를 데리고 갔다면 무슨 소리가 들려왔을까?

 "애는 기억도 못할 여행 뭐하러 데려가? 비행기에서 민폐야."


 어떤 선택을 하든, 재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재단할 것이며 형태만 바꾼 화살을 교묘하게 쏘아댔을 것이다. 이왕 맞는 화살, 원하는 것을 한 후에 맞는 것이 낫지 않을까? 편견을 배려하기 위한 자기 통제와 검열 같은 것들은 시원하게 던져버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결혼 후에도, 출산 후에도 여행을 떠났다.




'이 시국'이니까 엄마 여행기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빗장을 걸어 잠근 시국에 웬 여행 얘기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여행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결혼하면 역할에 짓눌려 나를 잃을까 비혼을 고려하게 되는 세대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개인으로서의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세대

 아이의 성장만큼이나 엄마의 성장도 소중한 세대



 이 시국 엄마들은 이런 세대다. '엄마만의 시간, 엄마만의 여행'이야말로, 지금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 이야기는 스리랑카 차밭 노동자에 대한 것이기도, 뉴욕 난민에 대한 것이기도, 핀란드에서 만난 성소수자에 대한 것이기도, 북극의 겨울에 대한 것이기도, 동시에 우리 모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미래세대를 키우는 어른으로서 한번쯤 톺아보아야 할 것들이기에 국경이 닫혀 있는 동안에도 시의성과 생명력이 있다고 믿는다.


 남편, 아이 없이 떠난 여행은 '나의 권리'와 '남의 권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동시에 '결혼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엄마에게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지금부터 이어질 글은 길 위에서 얻은 생각의 타래를 풀어가는 또 다른 여정이 될 것이다. 닮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 여행 다녀올게!"






친정엄마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떠난 2012 인도여행


경유지인 태국에서 남편을 낚아오다


코끼리 모양으로 생겼다는 섬 꼬 창 Koh Chang. 인생을 바꾼 여행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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