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람의 바다, 닐라벨리
스리랑카를 찾는 우리나라 여행자들 사이에는 <국민 코스>라는 것이 있다. 아니, 스리랑카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방문하는 루트와 장소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편이다.
여행지에서의 변수를 최소화하고 싶고,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시기와 일정이 비슷한 데다 직항 편은 한정적이니 생긴 여행 문화다.
이 코스에 충실한 대부분의 한국 여행자는 스리랑카 남부에 있는 갈(갈레) Galle 바다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청개구리. 다른 친구들이 서쪽으로 간다 해도, 내가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몸을 비틀어 방향을 튼다.
내가 향한 바다는 스리랑카 북동부 해안. 현지인들의 휴양지 '닐라벨리 Nilaveli'와 산호섬으로 이루어진 '피전 아일랜드 국립공원 Pigeon Island National Park'이 목적지였다.
닐라벨리행 버스에 올라 기사님께 숙소 주소를 보여주니 웬 허허벌판에 내려준다. 제대로 된 버스정류장 알림판조차 없는 시골 마을. 대충 방향을 잡고, 바다를 향해 걷다 보니 숙소가 나왔다.
넓은 마당에 단층으로 된 방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개인 샤워실과 화장실이 포함된 더블룸이 하루 3만 원이었다. 바다까지 걸어서 3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숙박비는 무척 저렴했다.
숙소엔 주로 장기 여행하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엄마 따라 세계일주 하는 영국 꼬마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조심스레 경계부터 하는 나와 달리, 만 3살 이안은 동네 어린이든 여행자든 가릴 것 없이 친구 삼아 어울렸다.
이안의 다정한 환영을 받으며 닐라벨리에 짐을 풀었다.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은 내전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4년엔 인도양 지진해일이 일어났다. 지역사회는 다시 모든 것이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남부 바다와 달리 외국인 여행자는 드물다. 고급 호텔이나 리조트가 없고, 여행 인프라도 전혀 갖추어져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인지 휴일인 주말에는 인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평일이 찾아오면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해변에는 멋들어진 빌딩이 아닌 앉은뱅이 오두막이 있고, 여행자를 따라다니며 호객 행위하는 사람 대신 동네 소가 드러누워 눈을 끔뻑였다.
레스토랑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붕과 벽이 없는 소박한 식당에서는 간이 식탁을 펴고 손님을 맞았다.
닐라벨리 바다가 별로라서 상업시설이 없는 거냐고? 그렇지 않다.
닐라벨리는 하와이나 푸껫, 발리보다 훨씬 매력적인 요소가 많은 곳이었다. 이보다 모래사장이 볼품없거나 물빛이 빛나지 않는 바다에도 외국계 대형 리조트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며 디너 크루즈나 요트투어, 해양스포츠 같은 관광상품이 넘쳐흐른다.
닐라벨리에 '없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닐라벨리에 있는 것을 설명한다면 간단하다.
외국계 거대 자본의 손길이 채 닿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바다가 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아시아의 많은 바다를 여행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현지인들은 언제나 노동자요 바다를 즐기는 것은 돈 많은 나라 관광객이라는 거였다.
고향 바다에 찾아오는 손님 덕분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정도라면 좋은 일이겠지만 너무 유명해져도 탈이 난다. 내가 살던 바다가 탐욕과 투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스리랑카 동북부 해안은 손때가 묻지 않았다. 숙소를 지은 할아버지도, 요리를 해오는 아저씨도, 왁자지껄 놀러 오는 사람들도 모두 현지인이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스리랑카 바다. 그런 닐라벨리가 좋았다.
여행 인프라가 거의 없는 스리랑카 동부에서 투어는 어떻게 할까?
해변에서 보트로 15분 거리에 있는 '피전 아일랜드'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숙소 주인 할아버지에게 연결을 부탁하자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투어를 예약해줬다.
그게 끝이었다.
돈도 내지 않았고, 예약이 확정되었다는 바우처도 없었다. 명함이나 연락처 역시 받지 못했다.
"그럼 어떡해요?"라는 불안한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뭐가 걱정이냐는 듯 심드렁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해변으로 나가 키 큰 사람을 찾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키 큰 사람이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세상에 키 큰 사람이 한두 명이란 말인가. 이래서 투어에 참여는 할 수 있을까 싶었던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부랴부랴 해변으로 나가 눈에 불을 켜고 키 큰 사람을 찾으려는 순간! 별로 애쓸 것도 없이 키 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키 큰 아저씨는 1인 여행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싸한 사무실도, 하다못해 작은 책상이나 깃발도 하나 없이. 그저 큰 키 하나만으로 투어 예약을 진행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키라도 커서 다행이었다. 보통 키였으면 어쩔 뻔했어. 못 만났겠네.
그에게 다가가 어젯밤 스노클링 투어를 예약했다 하니 내가 탈 배를 알려줬다.
배에 모여 있는 여행자들에게 투어 비용은 얼마 냈냐고 살짝 물어봤다. 1인당 3천 루피(약 3만 원)로 흥정을 끝마쳐 놓았다 했다. 어젯밤 숙소 할아버지가 말한 요금보다 1천 루피나 저렴했다. 비용마저 흥정 실력에 따라 들쑥날쑥하구나.
투어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적당한 시간을 합의하면 된단다.
무엇 하나 촘촘하게 짜여있지 않은 상황이 신선했다. 계획 없이 여행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해방감. 흥미진진했다.
닐라벨리 해변에서 배로 2km를 달리자 산호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로운 바위 산과 새하얀 모래, 엷은 색감의 바다는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바위 주변에 스카프를 깔고 소지품을 대충 던져놓았다. 다음은? 한 달음에 새파란 물속으로 입수!
바닷속은 용궁이었다. 산호의 백화현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건강하게 숨 쉬는 바다였다.
어림잡아 보아도 30종 가까운 어종이 눈 앞을 유유히 오갔고, 200마리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물고기 떼를 만났다.
수족관보다 화려한 바닷속을 남편과 함께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옆에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과 방금 본 물고기가 얼마나 컸는지, 산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감탄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혼자 하는 여행이라 해도 혼자는 아닌 법이다.
약속한 다섯 시간이 훌쩍 흘렀다. 이제는 닐라벨리로 돌아갈 시간. 선착장에 가니 키 큰 아저씨가 보낸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미심쩍어 잠 못 이룰 정도였지만, 모든 일은 정확하고 실수 없이 이루어졌다.
상업적인 관광 인프라에 익숙한 우리에게 닐라벨리는 조금 불편한 여행지 일지 모른다. 하지만 인프라가 없기에 느낄 수 있는 매력도 있다.
태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닐라벨리. 또 어디엔가 이런 바다가 있다면, 주저 없이 달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