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댁이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시점. 계획임신을 하겠노라 선언하고 나니 불현듯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기가 태어난 후 나는 과연 어떤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비행시간이 최대한 짧은 도시를 찾아다니며 깨끗하고 넓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말끔하고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편한 것만 찾는 여행'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편한 여행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여행이 필요한 때가 있으니까. 나는 그저, 젊은 날의 배낭여행을 당분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섭섭했다.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고,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는 것만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기차에서 쪽잠 자고, 빵조각으로 배를 채우며,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여행을 위해.
느낌상 배낭여행지로 딱 맞을 것이라 생각한 스리랑카는 예상대로였다.
초록으로 광활한 차밭, 드넓은 정글 속에 숨은 신비로운 고대 유적, 형형색색 산호와 물고기가 이루는 바다숲. 스리랑카야 말로 진정한 보물섬이었다.
그곳에서 주어진 밥상은 소박했고 숙소는 남루했다. 배낭은 무거웠고 버스엔 자리가 없었다. 구릉을 따라 느리게 달리는 열차는 호그와트행도 아니면서 2인 좌석에 4인이 앉는 마법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여행길이 아닌 고생길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신나서 방방 뛰며 "바로 이거야!"하고 소리쳤다.
이 모든 순간을 수줍고도 따스한 스리랑카 사람들과 함께했다.
같은 버스를 탄 청년은 배낭을 짊어진 나를 위해 선뜻 자리를 양보해주었고, 꼬마 숙녀는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 팔찌를 선물해주었다.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묻고, 내 손을 만지작대던 소녀의 온기를 잊지 못한다.
기차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내가 굶고 다닐까 봐 걱정됐는지 자꾸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고마운 일만 있지는 않았다.
"우리 아들이 한국에 일하러 갔어. 그러니까 너는 내 친구야." 하며 반가워하던 아이스크림 수레 아저씨는 정가보다 두 배의 아이스크림 값을 떼어먹었다.
몇 달도 전에 미리 예약하고 간 숙소에서는 돈만 받아먹고 방이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
숙소 주인이 "대신, 내 친구가 하는 숙소에서 묵게 해 줄게."하고 소개한 곳은 내가 지불한 숙박비의 절반에 묵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사기꾼을 봤나! 서럽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길바닥에서 대성통곡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조차 세계일주 하는 칠레 부부를 만나 도움을 받고 동행이 되었으니, 사소한 마찰과 갑작스러운 변수가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편하기만 한 여행이 아닌 이야기가 있는 여행. 그런 여행에 목말라있던 나는 이야기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배낭여행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낭을 메고 스리랑카를 걸으며 지금껏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왜 여행에 빠져들게 됐을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나는 한 때 성실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기성세대와 마찰을 겪지 않았다.
문제는 대학생이 된 후에 일어났다. 다양한 것들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길 원했던 나와 달리, 곁에는 빠른 안정을 외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휴학을 하고 해외자원봉사를 가겠다고 했을 땐 "유학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휴학하면 취업에 불리하지. 한 살이라도 어려야 취직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만류에 시달렸다.
NGO나 사회적 기업에서 진로를 찾겠다고 했을 땐 "월급 적은 직장에서 일하는 건 불효 같아. 신붓감으로도 인기 없을 걸." 하는, 막연한 불안함으로 뒤엉킨 충고를 들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맺음은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툰 충고를 한 이들의 심리적 배경도 이해가 간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현실에서 우리가 기댈 곳이라곤 결국 개개인의 능력뿐이니 말이다.
군말 없이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비슷한 자격을 갖춘 신랑감을 만나 일찌감치 자리 잡는 것이 우리의 미래이자 정설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겉돌았다.
그 시절, 여행은 기존의 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문이었다.
일단 여행을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각자가 지닌 생생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또래 백패커들을 접하며 외국 학생들이 갭이어 Gap year를 갖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학업이나 진로와 관계없이, 젊은 날에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하는 시간. 나 역시 스스로를 위해 그런 시간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낯선 장소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노라면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가치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값으로 매겨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인식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것을 반드시 '이 순간, 이 장소'에만 옭아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젊은 날의 여행 덕분에 비로소 생겨먹은 대로 살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보내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나와 결이 같은 단 하나의 회사에 지원했다. 친환경과 공정무역 제품, 연대의 가치를 전하는 생활협동조합 홍보팀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런 과거를 타박하지 않았다. 한두 해쯤 여행을 하며 보냈건, 스펙이 충분하지 않건 하는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의 직관이 옳았던 것이다.
새댁이 엄마가 되기 전에 떠난 여행은 새로운 이야기를 선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나간 경험을 되새김질하게 해 주었다.
배낭을 업어 메고 스리랑카 땅 곳곳을 누비는 동안 흘러간 20대를 떠올렸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던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흔들림은 여기서 접기로 했다.
이제는 그 경험을 딛고 일어나 나답게 살 일만 남은 것이다. 나를 위해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임신을 준비한다는 것은 반드시 신체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임신 확률을 높여준다는 음식을 챙겨 먹고, 풍진 항체를 생성하고, 엽산을 복용하는 것만이 '아이 맞이'의 전부는 아니다.
삶의 큰 변화를 앞두고 마음을 단단하게 가꾸어야 했던 시기, 나는 다시 한번 여행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