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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Oct 14. 2023

국제결혼 부부는 의사소통이 힘들까

모국어가 다른 남편과의 대화

몇 년 전 일인데도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어느 주말,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낚시도구를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잠이 부족했는지 아이는 곯아떨어지고 (럭키!) 남편과 나는 수다 대잔치를 시작했다. 창문을 가득 채운 하늘을 보며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니 분주한 일상에 뻑뻑하게 굳은 마음이 사르르 이완됐다. 대화는 자연히 깊은 고민을 나누는 쪽으로 흘러갔는데, 당시의 내 고민은 이런 거였다.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라디오가 주요 매체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영상의 시대가 가면 또 다른 뭔가가 올 거잖아. 나는 일흔이 되어도 여든이 되어도 활기차게 일하고 싶은데, 당장 10년 후에도 지금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이런 고민을 들은 지인들의 대답은 "재테크를 해 봐" 아니면 "유망 자격증을 따 봐"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재테크'와 '유망 자격증'이라는 방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었다. 내 취향과 성향과 선호와 고유함과 가치관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인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아도 그랬다. 노년의 내가 청년의 나를 돌아봤을 때 "일평생 자산 증식에 힘썼으며 유망 직종을 찾아 일했습니다"로 삶을 정리하기에는 어딘지 아쉬운 이 느낌. 아마도 나는 '세상의 흐름'이 아닌, '나의 흐름'을 위해 머리 맞대고 고민해 줄 사람이 간절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뜬금없었다.

"우리 신혼여행 갔을 때 생각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함무라비 법전 봤잖아."

"함무라비 법전? 그런 걸 봤나? 근데 함무라비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을 읽은 핫서방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나는 '이게 왜 여기 있나'를 생각했었다? 그 법전이 쓰여있는 매체는 책도 아니고 파피루스도 아니고 '돌'이잖아. 동네 공원에 있는 흔한 돌이었다면 거기 있지 않았겠지. 쓰여 있는 내용이 인류에게 굉장히 특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거잖아.

중요한 건 알맹이(中身)야. 그 알맹이를 돌에 새기는지, 책에 쓰는지, 라디오나 영상으로 표현하는지, 아니면 미래에 생겨날 또 다른 그릇에 담을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어떤 매체가 뜨는지, 무엇이 가장 핫한지도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의미 있는 알맹이만 갖고 있다면 형태가 뭐든지 상관없다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민짱은 알맹이가 있는 사람이야. 외국어인 일본어로 말할 때도 '이 사람 말에는 알맹이가 있구나'하는 게 느껴져. 지금처럼 알맹이만 확실하다면, 돌에 글을 쓴다 해도 가치가 있어.

제일 유감인 경우는 가장 뜬다는 기술은 갖고 있는데 알맹이가 없는 경우지. 현란한 그래픽을 연출해 내고는 있지만 내용은 없는 콘텐츠도 많잖아. 민짱이 자신의 알맹이를 잘 키우고 다듬어간다면, 앞으로 어떤 시대가 와도 잘 해나갈 거라 생각해."



남편 이야기를 들으며 노년의 나를 다시금 상상해 봤다.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 "자신의 알맹이를 키우고 다듬어 세상에 표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지나온 일생에 깊이 만족하는 마음으로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에서뿐만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것이 필요하겠다고. 남편이 나를 구석구석 깊이 살피고 알맹이 있는 조언을 해준 것처럼, 나도 남편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고 알아봐 주며 알맹이가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단지 생활을 공유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사이를 넘어 '알찬 무언가'를 나누는 부부로 살아가야겠다고 말이다.



국제결혼을 한 부부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며 의사소통이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결혼해도 말 안 통해 답답한 게 결혼인데,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얼마나 소통이 안 되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자주 들려온다. 한자를 쓰는 게 아니라 그리는 수준이고, 언제나 비슷한 구문만 활용하는 내 일본어를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언어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긴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돌과 책과 라디오와 영상이라는 '그릇'이 그러하듯, 인간과 인간의 '소통' 앞에 모국어가 동일한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닮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나누고 싶은 '알맹이'만 있다면. 일본어를 쓰는 배우자이든 힌디어 아랍어를 쓰는 배우자이든 깊이 이해하고 이해받는 결혼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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