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재라서가 아니라 시각 추구였음을

ADHD 아이가 집착한 것들

by 레이첼쌤

돌이 막 지난 시기부터 아이는 유독 엘리베이터에 나오는 숫자 보기를 참 좋아했다.

신기해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계속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숫자를 빨리 터득하는 게 참 신기하고 기특해했던 것 같다.


이건 자폐스펙트럼의 특징인 감각 추구의 일종이다.

대표적으로 시각 추구, 청각 추구 등이 있는데 말 그대로 다른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해서 그것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빛만 바라보거나 혼자 계속 빙빙 도는 행동들인데 자폐스펙트럼의 특성을 잘 모르는 부모들은 그냥 혼자 잘 논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이는 자폐스펙트럼은 아니고 ADHD인데도 시각 추구의 특징을 아주 강하게 보인다. ADHD도 감각 발달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청각적 주의력이 낮은 아이들은 아무래도 시각 추구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그동안 집착해온 다양한 시각적 자극들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두 돌 전에는 숫자, 한글, 알파벳과 같은 문자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한글을 빨리 뗐다. 아직도 헷갈리는 게 단순히 문자를 알기만 한 건지, 자신이 읽는 한글의 의미를 함께 알면서 습득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세 살 적부터 양치기 소년 같은 동화책을 줄줄이 읽었는데, 로봇 같은 말투는 아니었고 나름 인물의 감정을 살려서 읽곤 했다.


서너 살 때는 아이가 가장 통제가 안되던 시기였는데, 특히 바깥에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드러눕거나 악을 쓰고 울어서 참 난감했던 적이 많다. 아기 때야 너무 과하다 싶으면 내가 온몸을 잡고 안고 상황을 피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 크니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어디 나갈 때마다 항상 긴장하고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동차나 자전거 바퀴도 좋아해서 한참을 바라보거나 두 발 자전거 타는 동네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보기도 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말리려야 말릴 수가 없었다. 남자아이들은 태생적으로 모두 다 자동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장난감 자동차 바퀴를 굴리면서 굴러가는 모습을 관찰하는걸 더 좋아한 것 같다.


6살 무렵에는 흔한 남매 만화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고 그때부터 흔한 남매 제목을 달고 나오는 모든 만화책을 다 구매했다. 흔한 남매 내용이나 유머가 6살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아이는 내용 흐름보다는 그저 웃긴 만화 장면을 보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이것도 시각 추구의 일종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다 보고 나서 내용을 물어보면 잘 몰랐고, 으뜸이나 에이미가 말한 대사 중에 기억에 남는 것만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곤 했으니까. 흔한 남매로부터 시작된 만화책 사랑이 지금도 죽 이어져 오고 있다. 카카오프렌즈 세계 역사 문화 나라별 시리즈와 퀴즈 과학상식 학습만화를 즐겨 본다. 만화책은 독서와는 별개라서 문해력 발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나는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 영상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해서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게 시각 추구라고 할지라도 티브이나 패드보다는 만화책이 훨씬 건전한 편에 속하지 않을까.




전자제품 설명서도 아이가 정말 사랑하는 아이템 중 하나였다.

보통 전자제품 설명서는 글씨도 깨알같이 작고 중요한 작동 버튼 몇 개 외에는 세세이 볼 필요가 없어서 어디 서랍에 보관해두는 편인데 아이는 이 설명서에 굉장히 매료되는 모습을 보였다. 로봇 청소기, 블루투스 키보드, 쿠쿠 밥솥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설명서라면 다 좋아한다. 한참을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바라본 후에 그것을 따라 그린다. 한 때는 밥솥 설명서에 너무 집착해서 설명서에 나온 고장 시 증상과 대처 방안 목록 전체를 다 외워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거 외우지 않아도 된다고, 그만 좀 보라고 하면 너무 재미있어서 다 기억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다행인 건 끝까지 집착하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본인이 파악했다 싶고 흥미가 떨어지면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7세에는 한창 한자에 꽂혔다. 한자는 알고 있으면 국어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어휘력 향상에도 좋으니 한자 집착만큼은 지지해주려고 했다. 단계별 한자 학습지를 사주기도 하고 마법천자문 만화 시리즈를 통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온 집안 벽에 한자 학습 브로마이드를 붙여두었다. 쉬운 단계에서부터 내가 모르는 꽤 어려운 한자들까지 열심히도 익히기 시작했다. 얘가 한자 영재가 되려나 싶을 정도로 한자 교재도 내가 집안일하고 있으면 혼자 풀기도 하고 나에게 문제까지 내고 자기가 채점해주기도 했다. 등산이 감각 발달에 도움이 된다기에 동네 뒷산에 데리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정말 산에 올라가고 내려오는 시간 내내 나에게 한자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친구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등 자기가 일상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대화를 하며 부모와 상호작용을 할 텐데 내 아이는 오로지 나와 한자 이야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시각 추구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 1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 한자 재미없다고 다 까먹었다고 방과 후 한자반에도 관심이 없다. 낮은 단계의 기본적인 한자들만 기억하는 정도다.

유치원에서 하원할 때에도 뭐하고 놀았는지, 어떤 수업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기가 인상 깊게 본 교실의 안내문이나 시각적 교구에 대한 이야기부터 했다.


언제쯤 이 아이와 보통 아이들이 하는 그럼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때가 오긴 오는 걸까 매일 생각하며 나는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는 공항에서도 시각 추구 거리를 용케도 찾아냈다. 공항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는 비행 항로가 그려진 커다란 화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도도 워낙 좋아하는 아이인데 지도 위에 비행기들이 그려져 있고 조금씩 움직이는 그 화면이 아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던 것 같다. 아빠가 타고 올 비행기를 한 시간 남짓 기다리는데도 비행항로 보느라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또래 남자아이가 몇 살이냐고 말을 걸어왔고 아이보다 한 살 형이었던 그 아이는 몇 마디 건네보더니 너 한글 잘 못하냐고 타박을 줬다. 8살이라는 아이가 하는 말이 어설프니 직설적으로 말한 거였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내 속은 타들어갔다.


한창 오징어 게임 열풍이 불어서 마트나 문구점 어딜 가도 오징어 게임 굿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때에 아이는 드라마는 보지도 않았음에도 오징어 게임이란 것에 사로잡혔다. 놀이터에서도 고학년 아이들조차 시시해서 하지 않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노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우연찮게 유튜브에서 어몽어스 캐릭터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노는 영상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이는 그 영상에 또 집착했다. 어몽어스도 좋아하는 캐릭터인데, 오징어 게임까지 더해지니 얼마나 재미있어했는지. 보통 아이들도 이런 걸 좋아할 수는 있지만 내 아이의 문제는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시종일관 이것만 머릿속에서 생각이 나서 이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학교는 가야 하는 곳이기에 잘 다녀오긴 하지만 집에 와서 긴장이 풀리기만 하면 자신이 집착하는 시각 추구 거리들을 당장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것 때문에 나와 항상 실랑이를 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안 보여주려는 자와 어떻게든 보려는 자와의 다툼 말이다.


유튜브 영상은 백해무익하다고 여겨져서 내가 미친 사람처럼 악을 지르면서 제발 그만 보라고 화를 냈더니 아이도 놀라고 충격받았는지 웬만하면 본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같은 반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고 특히 남자아이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아이도 무한의 계단 같은 게임에 한창 꽂혔다. 시각 추구를 하는 아이에게 게임처럼 재밌고 중독되기 쉬운 게 어디 있을까. 하루에 20분 시간을 정해서 시켜주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계속 게임 이야기만 하고 그에 관한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게 문제다.




올해 동네 엄마들과 야구장에 자주 다니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시각 추구의 대상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경기장 한가운데에 있는 전광판이다. 야구 선수들과 선수들의 수비 위치, 전적, 타율, 상대팀 목록이 나온 화면이 아이에게는 훌륭한 먹잇감이었는지 야구장만 다녀오면 전광판을 거의 똑같이 재현해서 그렸다. 다른 아이들도 전광판을 보긴 하지만 이렇게 자세히 보지 않을뿐더러 야구장에 가는 목적도 거기에 구비되어 있는 놀이터와 모래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 위함이지 내 아이처럼 전광판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 종일 전광판만 보는 게 아니라 절반 정도는 같이 간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나름 복잡한 야구 규칙도 슬슬 이해하기 시작했다. 규칙을 알게 되니 야구 경기 자체에 집중해서 보기도 했다. 그래도 시각 추구에 인지적 이해가 더해지니 그래도 썩 나쁘게만 볼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초등학생 남자아이들도 야구 좋아하는 아이들도 많으니 내 아이도 인기 스포츠 한 종목은 제대로 알고 있으면 공통 관심사를 공유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시각 추구를 하다 보니 컴퓨터 키보드에 빠져 들어서 타자 연습도 한창 열심히 해서 스스로 한글 타자도 어렵지 않게 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에는 코딩이라는 새로운 시각 추구 감을 찾아냈다. 엔트리라는 코딩 연습 사이트에 들어가서 혼자 책 보면서 코딩을 하고 시연해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기초적인 것 몇 번 해본 주제에 코딩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는 건 특히 영유아기에는 긍정적인 발달적 신호가 아니다. 감각 통합 수업을 받아서 도움을 받는 게 좋고, 시각 추구할 거리가 최대한 없는 자연에서 놀거나 자주 몸놀이를 해주면 좋다. 몸으로 비비고 힘을 쓰고 놀면서 시각 추구만 하다가 자연스럽게 퇴화될 수 있는 몸의 감각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필요하다.


언급한 것 이외에도 아이가 여태 시각 추구해왔던 것들은 굉장히 많은데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발달에 어려움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시각적 자극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하고, 이 시각 추구를 상호작용을 하며 놀 수 있는 놀이로 연결시켜서 함께 놀아주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가 전자제품 설명서를 외워서 쓰고, 구구단을 금방 암기하고, 어려운 한자를 습득하는 것이 아이가 똑똑하고 영재여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자극보다 그 시각적 자극에 더 흥미를 느껴서 많이 보기 때문에 잘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라는 걸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keyword
이전 10화내가 본 남편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