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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ug 05. 2023

파친코에서 발견한 자폐스펙트럼 장애

발달장애는 어디에나 있었다


파친코를 읽다가 주인공급은 아니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조연급인 하루키의 이야기에 눈이 갔다. 하루키는 주인공 선자의 아들인 모자수의 고등학교 친구이다. 재외한국인인 모자수와 달리 일본인이지만 학창 시절 주변을 겉돌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모자수와 극적으로 친구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 의지하며 학교 생활을 하다가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에 전념하느라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하루키는 학교에 혼자 남게 되었지만 성실히 공부를 했는지 경찰의 꿈을 이루게 된다.


하루키에게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약점이 하나 있는데, 동성애자라는 사실이다. 고백하진 못했지만 속으로 모자수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성실하고 착한 여자인 아야메와 결혼해서 부부로 지낸다. 하지만 아야메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하루키의 친동생 다이스케 때문이다. 다이스케는 어려서부터 좀 이상했던 아이라고 나오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거의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묘사되어 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글들이 쏟아진다. 그간 내가 읽은 발달장애 관련 책들에서 자주 봤던 문구들이다. 다이스케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보니 "자폐스펙트럼"이라는 단어만 없지 정확히 자폐 증상을 지니고 있다. 19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했기에 발달장애나 정신의학과적 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냥 좀 모자라고 이상한 아이, 학교에 보낼 수 없는 상태의 아이로 취급하며 집에 데리고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이스케는 서른 살이 다 됐지만 정신연령은 대여섯 살에 불과했다. 소음이나 많은 사람, 밝은 빛을 접하면 흥분했기 때문에 바깥에 자주 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병과 죽음은 다이스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어머니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아야메가 다이스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야메는 다이스케가 새집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규칙적인 일과를 정했다. 요코하마에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기꺼이 일주일에 닷새씩 집에 와 다이스케를 교육해 줄 미국인 특수교육 교사도 찾을 수 있었다.
 다이스케는 일반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하거나 혼자 살 수도 없었지만, 아야메는 다이스케가 사람들의 기대치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루키는 아야메의 사려 깊은 생각을 고맙게 여겼다.

<소설 파친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큰 특징 중 하나인 소음과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에 가거나 밝은 빛을 보면 흥분하는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하루키와 다이스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하루키의 아내가 다이스케를 거의 전담해서 돌보아주고 있다. 남편의 남동생이 장애가 있는데, 함께 살면서 책임지고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다이스케는 아마 중증의 자폐 스펙트럼인듯하다. 사회생활은 거의 할 수 없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고 밖에 외출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니 말이다. 이렇듯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성인이 되어서도 옆에 누군가 돌보아줄 사람이 없으면 제대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케이스도 있다.


소설이긴 하지만 수십 년 전 과거 일본에도 이런 발달장애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예전 시대에도 지금만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신의학과적 문제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내 아이도 그중 하나인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저 동네 바보 취급당하며 평생을 살았을까.




하루키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너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목매달아 죽고 싶었고 여전히 그 생각을 했다. 하루키는 모든 범죄 중에서 살해 후 자살하는 경우를 가장 잘 이해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이스케를 죽인 다음에 자살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다이스케를 죽일 수 없었다. 입에 담지도 못할 그런 짓을 아야메에게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

<소설 파친코>



다이스케의 형인 하루키의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공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고백하자면, 절대 그러면 안 되지만, 나도 모르게 문득 하루키와 비슷한 생각이 든 적이 있다. 평생을 이런 어려움을 안고 사느니 그냥 너 죽고, 나도 같이 죽자 하는 생각. 아주 가끔 신문기사에 나오는 장애를 가진 자식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는 그런 이야기.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소중하고 모든 인간은 존엄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다른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고 평생의 부담이 된다면.. 그 모든 걸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동생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하루키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성실한 일본의 경찰이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모범 시민이다. 그저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동생이 없었다면 자신도, 자신의 어머니도, 그리고 자신의 아내도 모두가 편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파친코에는 태생적으로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 나오는 편인데, 주인공 선자의 아버지도 언청이에 절름발이로 묘사된다. 그가 가진 장애의 핏줄 때문에 동네에서 꽤 잘 사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혼사 이야기가 쉽게 오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자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다.


예전에도, 지금도, 소설 속에서도 태생적인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은 어디에나 꼭 있었다.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배신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게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 남보다 잘난 유전자를 받아 태어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


이민진 작가가 설정한 이 태생적 부족함을 지닌 인물들의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파친코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만큼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면을 다루어주고 있는 것 같다. 흥미롭게 읽고 있던 소설에서 자폐 스펙트럼 이야기를 우연히 접했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상당한 위로를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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