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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20. 2023

녜녜, 올해도 프리퀀시 노예인증이요

호구되는 줄 알면서도 넘어가는 심리에 대하여

스세권에 살고 있지만 평일에는 스타벅스에 자주 가지 않는다. 주로 더 가까이에 위치한 컴포즈나 메가커피에서 아주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가격으로 카페인을 충전하는 편이다. 10잔 마시면 1잔 무료로 주기까지 하니 더욱 충성 고객이 되어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매일 즐긴다.


그런데 11월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남편이 물어온다. 올해도 프리퀀시 적립할 거냐고. 지금껏 내가 프리퀀시 적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은 한심 해하는듯한 자세를 취하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먼저 나서서 올해 프리퀀시 이벤트 소식과 리워드 상품들을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연말마다 미션음료 포함 17잔의 커피를 마시고 다이어리를 받던 나였지만 올해는 조금 달라져보기로 했다. 어차피 가성비 넘치는 프랜차이즈 아메리카노 맛에 적응도 했겠다, 스타벅스는 주말이나 특별히 약속 있을 때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굳이 미련도 없었다.


말이 쉽지 17잔을 채우자면 매일 하루에 한 잔을 마셔도 2주 넘는 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두세 잔씩 스벅에서 커피를 사 마실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야 쉽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올해는 그냥 넘기겠다고, 프리퀀시에 더 이상 집착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더니, 이제는 남편의 태도가 더 달라졌다. 왜 안 하냐고, 리워드 상품들도 퀄리티 좋아 보이니까 일단 채워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주말 아침이면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토피넛 라테를 포함한 미션 음료도 종류별로 사 오고, 주중에도 기회 되면 한 잔씩 사 먹고 스탬프를 보내주었다. 워낙 적극적이기에, 나도 이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끊고 한동안 4500원씩이나 하는 아메리카노를 부지런히 마셨다.








시즌 음료 중에서도 연말에 매년 출시되는 토피넛라테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프리퀀시 적립 시즌에만 판매하는 음료인데 왠지 이걸 마시면 올 한 해가 다 갔다는 느낌도 들고, 추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 크리스마스가 온 것 같은 느낌,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등이 나를 사로잡는다. 오리지널 스타일로 마시면 칼로리가 높기도 하고 살짝 느끼해서 나는 저지방 우유 옵션으로 바꿔서 마시곤 한다. 하지만 토피넛 라테의 가격은 6천 원대로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그래도 따뜻하고 달달한 맛이 당길 때면 나도 모르게 토피넛 라테를 주문하고 만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17잔이나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그 돈을 다 합치면 질 좋은 다이어리 따로 사는 게 더 낫다고. 게다가 몇년간 부지런히 쓰던 다이어리도 올해는 열정이 식어서 필요할 때만 메모 기록용으로 쓰고 있다. 굳이 새로운 해가 온다고 해서 다이어리를 하나 장만해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다.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도 충성고객이 되어 프리퀀시 적립에 열을 올리는 것인가.. 제대로 호구된 기분인데, 호구되었다는 거 알고 있는데, 알면서도 그냥 당해주는 그럼 느낌이다. 대기업 마케팅이 이렇게 무섭다. 지난 몇 년간 켜켜이 축적되어 온 특정 브랜드에 대한 애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불과 몇 개월 전 서머 프리퀀시 이벤트에 성실히 참여하고 받은 리워드 상품도 받고 나서 그 조악한 질에 깜짝 놀랐다. 쓸데없이 예쁘기만 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에 하나 들인 기분이었다.


다이어리에 대한 욕망이 사라져서 차선책으로 달력을 받기로 했다. 17개 스탬프를 채우고 나면 그날 바로 받을 수도 없다. 수령날짜를 따로 지정해야 받을 수 있고, 우리 동네 지점에는 이미 다 솔드아웃이라 차 타고 다른 동네까지 가야만 했다. 그날 따라 수령인들이 많은지 길게 줄까지 서서 그 달력을 받았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음.. 이게 비싼 커피 17잔의 가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연말 되면 여기저기서 달력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나중엔 처분할 고민까지 하게 되는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해서 달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일러스트는 매달 그 계절의 특징을 캐치해서 따뜻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잘 그린 것 같긴 하다. 그림 중간에 빠지지 않고 스타벅스 로고도 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허무한 느낌은 뭘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내년 겨울에도 나는 프리퀀시 이벤트에 또 참여하고 있을까? 내가 과연 참여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대기업의 장기적이고 치밀한 마케팅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일단 받은 달력을 보면서 내년에 두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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