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아이 키우기
ADHD인 아이를 키우는 일이 항상 불행한 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이에 대해 쓴 글들을 살펴보면 거의 다 부정적이고, 그동안 얼마나 아이 때문에 힘들었고, 고통스러웠고, 고민과 번뇌의 세월들을 살아냈는가에만 집중되어 있다. 스스로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장점도 많고, 재능도 없지 않으며,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순간들도 많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고, 엄마로서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고 예뻐하며 아이 덕분에 행복함을 느꼈던 일들은 너무나 뻔하기에 따로 기억의 뇌리게 강하게 남지는 않는다.
아마 ADHD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 중 하나를 꼽자면, 담임선생님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전화 통화가 아닐까 싶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하루, 하루 긴장의 연속이었다. 등교한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마치 그것이 내 의무인 양 열심히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치원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시에 항상 아이의 부족한 사회성과 언어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전화만 끊고 나면 한동안 우울의 늪에서 살았기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는 도대체 얼마나 더 부정적인 이야기가 이어질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정식 학부모 상담 기간 전에 전화가 오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던지.
3월 한 달이 지나고, 상담 기간이 시작되었다. 가정통신문에 학부모 상담시간을 적어서 보냈는데 그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나는 메모할 노트와 펜을 들고 언제 울릴지 모를 핸드폰을 노려보며 대기했다. 너무 긴장되어 겨드랑이에 땀까지 맺힐 지경이었다.
유치원 때처럼 아이가 친구들이랑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고 하면 어쩌지?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늘 다른 생각만 하는 것 같다고 하면 어쩌지?
왜 도움반을 진작 신청하지 않았느냐고 타박하시면 어쩌지?
그러나 상담이 시작되고 선생님의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우리 OO 이는 반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열심히 수업에 참여해요.
학습 속도가 빠른 편이고 하고 싶은 말은 글, 그림으로 표현해서 저에게 보여주면서 설명하기도 하고요.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고 도움반 친구를 도와주기도 해요.
발표시킬 때마다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하고 싶어 하고 규칙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도덕성이 있어서
잘 지키려고 하고 마음씨가 따뜻한 아이라 나중에 고학년 되면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장 표현도 능숙한 편이고 1학년 국어교과의 성취 도달 기준은 거의 완성된 수준이에요.
교우관계도 원만한 편이니 집에서도 칭찬 많이 해주세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언젠가 나올지 모를 선생님의 "그런데, 어머니, 혹시..."라는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나오지 않았다.
왜 작년과는 상담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 걸까.
결국 약물의 힘인가.
아니면 선생님께서 워낙 아이의 장점에만 집중해주시는 분이라서 그런 걸까.
나만큼이나 아이의 초등학교 적응에 노심초사하며 매일 불안해했던 친정엄마도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내용을 듣고 펑펑 우셨다. "다 네 노력 덕분이다. 나는 우리 아기가 잘할 줄 알았다. 고생했다."라고 연신 말씀하셨다.
나도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이제 아이와 함께 생활한 지 한 달 남짓이고 좀 더 다양한 상황에서 아이를 접해보지는 못하셨기에, 2학기 상담 시에는 또 다른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애써 무시했다.
백일몽이라 할지언정 일단 축배를 들기로 하고 마음껏 기뻐했다.
2학기 상담 시에도 선생님은 아이가 모든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고 복도, 운동장에서 잡기 놀이하며 항상 신나게 논다고 하셨다.
친구 관계로 깊게 친해지질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하니 초1, 2학년 때는 너무 한 두 명과 절친이 되어 그 아이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여러 명이랑 편견 없이 잘 어울리는 게 더 바람직한 모습이고 어른들이 말하는 그런 우정을 논할 수 있는 친구 관계는 최소 3, 4학년부터 나타난다고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한다.
수업태도는 좋은 편이고 손 들고 자주 발표하며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건 장점인데, 꼼꼼하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부족하고 뭐든지 급하게 빨리 끝내려는 성향이 강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걱정하고 눈시울이 빨개지기도 하며 긴장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더듬는 모습을 보인적이 있으니, 학교나 가정에서 "천천히, 편하게 해도 괜찮아."라고 지도해주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셨다.
칭찬만 들었던 1학기에 비해서 단점에 대한 코멘트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내가 소화해낼 수 있는 정도였고,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다.
마지막에 상담을 마무리할 즈음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울컥했다.
어머니, 아이가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요.
하아.. 담임선생님 보시기에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높구나.
그놈의 자존감이 뭐라고 어떻게 하면 높여줄 수 있을지 온갖 육아서와 자녀교육서를 읽고 밤낮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안 되면 화내고 울컥하고 짜증 냈던 그 모든 시간과 장면들이 내 눈앞을 스쳐간다.
선생님께 도대체 어떤 면에서, 무엇 때문에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하셨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자존감이 높다고 칭찬해준 마당에 그 사례와 이유까지 일일이 들려주라고 하는 건 과한 욕심이라고 판단했다.
요즘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문제의 그 "자존감"을 제목으로 하는 책들이 정말 많다. 비단 자녀교육서뿐만 아니라 발달 장애, adhd, 자기 계발, 심리서적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애나 어른이나 자존감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이 힘든 사회에서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외친다.
자존감이란 게 대체 뭐길래 이 난리인 걸까.
자존감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의 결과이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이되, 실제 자신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존감은 완전히 주관적인 여건으로, 타인들의 판단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존감이 정체성 구축에 건설적인 여건으로 작용하려면, 실제의 내 모습과 내가 이 이미지에 내리는 가치 판단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아야 한다.
건전한 자존감은 정신적 안정의 핵심 요인이자, 성공적인 삶의 원동력이다.
자존감은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영재의 심리학>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나에게 가장 심플하게 다가왔던 정의는 <영재의 심리학>이라는 책에 나와 있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 결과이고,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일반 아이들에게도 건강한 자존감 형성이라는 게 쉬운 과제는 아니겠지만, 특히 발달 장애를 겪는 아이들은 사회성 부족으로 인한 "자존감 저하"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부모가 특히나 더 신경 써서 도와주어야 한다고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양육 목표 중 하나도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높은 어린이로 자라서, 자존감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존감이 높다, 라는 말을 가족, 친척도 아닌 학교 담임선생님께 듣게 되니 미치도록 날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학교 선생님은 아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학생들과 가르치고 함께 생활하다보 보면 그 아이에게서 가정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물리적으로는 아이 혼자 학교에 가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이지만 사실은 양육자와의 관계, 가족들로부터 받는 사랑, 가정의 안정감 등이 아이에게서 여과 없이 보인다. 아이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선생님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한다. 아이가 문제 행동을 하거나,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경우에 학부모님을 만나보면 십중팔구 이해가 간다. 부모의 외관뿐만 아니라, 말투, 행동, 삶에 대한 태도까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아이가 자존감이 높다, 라는 칭찬이 나를 향한 칭찬인 것 같아서, 아이 참 잘 키우셨어요라는 우회적 표현으로 내 멋대로 해석하고 설레어하며 흥분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리 아이 예쁘게 봐주시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라 봐주어서.
자존감만 높다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지금은 친구 관계가 서툴러서 힘들어할 때가 더 많지만, 조금씩, 차츰 나아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발달장애, ADHD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에게도 꼭 말해주고 싶다.
아이에게 어려움이 있어도, 그 정도가 얼마가 됐든 간에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키울 수 있다고. 그 건강하고 튼튼한 자존감으로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할지라도 함께 헤쳐나갈 수는 있다고.
일반 학교에 적응도 못 할 줄 알았던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간다고 밥을 먹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마주하는 매일 아침이 기적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