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을 관리하는 비결
언제부터인가 3-4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쇼핑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생겼다. 바로 등원룩, 꾸안꾸, 집앞룩, 마실룩, 마트룩, 원마일웨어.. 등이다. 베이지나 크림색 같은 무채색 계열의 튀지 않는 색상에 몸매를 커버할 수 있는 헐렁하고 허리도 고무줄로 되어 편안함이 포인트다. 집에서 청소하거나 설거지할 때도 불편하지 않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이렇게 집안일하다가 갑자기 아이 하원시간이 되면 밖에 뛰쳐나가면서 입을 때도 너무 편해 보이지 않는(?) 그런 장점을 특징으로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점차 편한 스타일을 찾게 되기도 했고, 집에서 살림하는 삶을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옷들을 주로 구매하게 되었다. 출근할 때 입기에는 뭔가 너무 아줌마룩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잘 안 입었는데 이제는 집에 있으니 물 만난 고기처럼 거의 꾸안꾸룩만 사는 나를 발견한다.
어차피 동네밖을 벗어나지도 않고 매일 아이 동선에 맞춰서 생활하는 마당에 치마나 타이트한 청바지, 쟈켓 따위는 불편하기만 하지 입을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게다가 약간 차려입은 듯한 옷을 입으면 신발도 그에 맞춰서 구두 아니면 단화라도 신어야 하는데 애데릴라로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겨울엔 어그슬리퍼, 여름엔 아무 쪼리나 슬리퍼가 최고라는 걸 알게 된다.
작년, 올해 내가 산 옷들이 거의 다 이런 꾸안꾸룩이었다. 쇼핑몰에서 모델들이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 꾸안꾸지 꽤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옷은 싸구려 동대문표일지 몰라도 그 모델들은 다들 명품 시계에 명품 가방, 아니면 스카프라도 멋진 걸 두르고 있어서 등원룩이어도 꽤 점잖아 보이기도 하고 꾸며 입은 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내가 입으면 저런 우아한 엄마 느낌이 나지 않을걸 알면서도, 동네에 다니면서 매번 저렇게 명품가방과 액세서리를 부지런히 착용하고 다니지도 않을 거면서도, 속는다는 기분으로 한 번씩 주문한다.
결국 내가 입으면 그저 그런 후줄근한 옷이 되고 만다. 니트 재질은 어찌나 연약한지 몇 번 입으면 무릎이 튀어나오거나 보풀이 여기저기 마구 일어나서 진짜로 홈웨어로만 입어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작년에 산 건데,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도저히 밖에 입고 다니기에는 부끄러워서 처분한 옷들이 늘어난다.
저번 주말에는 아주 오랜만에 스타킹에 딱 붙는 니트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물론 원피스 위로 코트를 걸칠 거라 비루한 몸매는 감싸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감 있게 입었다. 남편의 눈빛이 달라진다. 웬일이냐며, 요새 맨날 편하게 입더니 갑자기 아가씨 때로 돌아간 거냐고 묻는다. 아이 낳고 나서도 출근할 때에는 늘 이런 스타일의 출근복장을 즐겨 입었는데, 편하게 입기 시작한 건 불과 일이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 잊어버렸나 보다. 남편 눈에 그저 나는 매일 편하고 헐랭한 옷만 입는 여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20대에는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치마는 입어본 적도 없고, 아무리 발이 아파도 늘 5센티 이상 굽 위로 올라가 있었다.
살은 좀 붙었지만 그래도 전에 외출복으로 즐겨 입던 옷들을 못 입을 정도는 아니다. 억지로 욱여넣으면 어느 정도 예전 느낌 그대로 돌아온다. 집에만 있다 보면 특히나 청바지는 더더욱 멀리하게 된다. 안 그래도 나잇살이 붙는 느낌인데 몸에 딱 붙어서 긴장감을 주는 청바지는 멀리하고, 늘 편한 니트바지나 츄리닝 바지만 입다 보니 안 붙을 살도 더 달라붙는 것 같다. (실은 많이 먹어서지만)
나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옷을 입기로 했다. 특별히 어디 나갈 데가 없고, 갈데라고는 고작 마트나 아이 학교, 학원 정도의 동선이라고 해도 말이다. 집에서 입는 옷인지, 밖에서 입는 옷인지 구분되지 않는 스타일은 편하긴 하지만 그 속에서 점점 초라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오소희 작가는 엄마들에게 기분 전환을 위해 첫 번째로 제안하는 게 아침에 먼저 눈썹부터 그리라고 한다. 간단한 화장은 하고 다니라는 뜻인 듯하다. 특별한 약속도 없고, 불러주는 데가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몸가짐은 갖추고 지내자는 게 포인트다.
하다못해 집에서 청소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고 하니 기분이 조금 달랐다. 자다 일어나서 잠옷을 그대로 입고 할 때는 편하긴 하지만 나란 사람이 그냥 청소 중인 아줌마로 느껴졌다. 치마에 스타킹을 입고 청소를 하고 있으니 마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전문직 여성이 된 기분이다.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우리 집의 청결과 아늑함을 유지하기 위한 특급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중이라고 표현된다고 할까. 편한 옷이 아니라 배에 힘이 들어가니 긴장이 되어 살도 덜 찔 것 같다. 입는 옷 그대로 밖에 나갈 일이 생겨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동네 근거리만 돌아다닌다고 해도 마주치는 사람들은 꼭 있다. 아는 동네 엄마나 학원 선생님 아니면 경비 아저씨라도 만난다. 우연히 마주치는 내 모습이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매일 후줄근한 옷에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다니는, 누가 봐도 집에서 애 키우는 엄마라는 인상을 주는 동네 주민 될 것인가, 깔끔하게 차려입고 단정하게 꾸며서 기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좀 귀찮더라도 나는 후자가 되어야겠다. 아침에 십 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오늘의 계절에 맞춰서 입을 옷을 고르고, 드라이도 좀 하고 길에서 전 남자 친구를 우연히 만나더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를 챙기련다.
아무도 나를 볼 사람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 내 아이는 나를 볼 것이고, 아이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를 보지 않는가. 아이 키우는 동네 엄마로 살아보니, 다른 엄마를 볼 때에도 친분도 없고 대화를 따로 나누지 않으면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겉으로 보이는 외양뿐이다.
갑자기 외출복에 신경 쓰겠다고 쇼핑을 할 필요는 없고, 전에 즐겨 입었던 조금은 아가씨 느낌이 나는 옷들을 하나씩 꺼내서 입으면 된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힘들다면 하루는 편하게 입던 옷을 입고, 하루는 조금 꾸민 듯 입어도 좋다. 나도 이렇게 해보자고 마음먹은 지 이제 삼일 되었다. 하루는 치마를 입었고, 하루는 안 입던 타이트한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귀찮아서 잘 안 하던 다이슨 드라이기도 아침에 이삼 분 더 시간을 들여서 컬을 주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시대인데, 기분을 관리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상쾌한 기분을 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을 좀 꾸미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꾸안꾸는 최대한 예뻐 보이게 꾸밀 대로 꾸민 쇼핑몰 모델들에게나 가능하지,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그냥 안꾸가 돼버린다는 사실도 함께.
<사진출처-SBS 동상이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