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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18. 2024

남편이 탄수화물을 끊겠다는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또 무슨 유튜브 영상을 봤는지 갑자기 남편이 탄수화물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삼시세끼 쌀밥 챙겨 먹어봤자 중년의 나이가 된 몸에는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다는 내용으로 일장연설을 했다. 나도 탄수화물이 별로 안 좋다는 거 알고 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밥 한 그릇 고봉으로 먹기보다는 절반 정도, 딱 배 부를 정도로만 자제하면서 먹으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그에 비해 남편은 그다지 탄수화물 섭취에 관해서 철저히 제한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동안이기도 하고 살찐 편은 아니라 그런대로 봐줄 만하긴 하지만, 나잇살 탓인지 눈에 띄게 늘어나는 뱃살은 막기가 힘든 모양새였다.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라 식단 조절만이 가장 빠른 건강 유지법이긴 하다.


그런데 갑자기 탄수화물을 끊겠다고 하면, 저녁밥 메뉴는 어떻게 준비하라는 건지.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6첩 반상을 매번 준비해서 밥상을 대령하지는 않았지만 김치 포함해서 있는 반찬 두세 개에 된장찌개나 제육볶음, 마켓컬리에서 사둔 맛집표 주메뉴 하나로 차려주곤 했다. 싫어하는 반찬이나 식재료는 아예 제외해두고 차려주어서인지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매번 대충이라도 저녁밥을 챙기는 일은 신경이 많이 쓰인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밥을 안 먹겠다면, 그럼 대체 뭘 준비하라는 거야?"



"그냥 탄수화물 빼고 해 줘."


"...."



남편은 단호했다.




"그럼 탄수화물 빼고 단백질 위주로, 헬스 하는 애들처럼 닭가슴살이나 삶은 계란 위주로 먹겠다는 거야?"



평소에 닭가슴살 싫어하는 거 뻔히 알고 있기에 닭가슴살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리는걸 금방 캐치했다. 닭가슴살은 아니고 삶은 계란이나 샐러드 위주로, 혹시 밥을 곁들여야 하는 메뉴라면 밥양을 아주 적게 하라는 둥,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두리뭉실한 대안을 내놨다.



다이어트한답시고 샐러드만 저녁으로 때우던 때도 있었지만, 절대 샐러드로만 끝나지 않았다. 한창 허기진 타임에 퇴근하기 때문에 야채 가득한 샐러드만 먹으면 계속 허기지다면서 냉장고와 간식 서랍을 뒤적이는 남편이었다. 풀떼기 말고도 계란이나 식사 대용 건강빵 따위를 같이 곁들여줘도 허기져하곤 했다.



샐러드만 먹는다는 건 고역이라는 걸 깨닫고 그 후로는 어떤 메뉴든 그냥 과식하지 않고 적당히 먹는 정도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탄수화물 섭취 중단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본인 건강을 위해서 큰 결심을 했다고 하니, 장단은 맞춰줘야 하는 게 내 임무라 여겨졌다. 집안의 대들보이자 가장인 남편의 건강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슈니까, 점심은 아무래도 외식 메뉴를 많이 먹고 탄수화물을 피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식단과 건강에 신경 써야 하니까, 탄수화물 없는 클린 한 식단을 대령해드려야 할 합당한 이유는 많았다.



요즘엔 정말로 샐러드만 만들어서 주는데, 그 내용물을 풍부하게 하려고 신경 쓴다. 빈약한 샐러드만 먹었다가는 금세 배고파지고 어설프게 배가 불러서 성질만 더 돋울 수도 있으니, 풍성한 샐러드를 만든다. 양상추, 오이, 당근, 새싹채소, 방울토마토 같은 채소에 삶은 계란, 버섯, 병아리콩 등을 단백질로 추가한다.



샐러드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만들다 보면 현타가 와서 그냥 로켓프레쉬로 적당히 완제품으로 나오는 샐러드 사서 먹이고 말지 하는 생각이 솟구쳐 오른다. 막상 완제품으로 나온 샐러드를 보면 생각보다 부실하기도 하고, 용량도 적어서 이 돈이면 내가 만들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고 돈이 아깝다.



샐러드를 아무리 풍성하게 해 줘도 배가 차질 않으니 은근히 집에 남는 간식을 찾아본다거나 냉장고를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다. 어떤 날은 샐러드가 질린대서 그냥 만두 몇 개만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주기도 하고, 아이 반찬이 많이 남은 날에는 아주 소량의 밥에 차려주기도 했다.  



남편이 샐러드를 저녁으로 먹겠다고 선언하니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가긴 하는데, 장점도 있다. 덕분에 나도 샐러드를 챙겨 먹게 된 것이다. 자주 샐러드를 먹으려고 했지만 늘 나 혼자 먹기 위해서 그 많은 야채를 사서 냉장고에 쟁여두는 게 아까웠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준비한 반찬에 밥 조금만 곁들이면 한 끼 대충 때울 수 있는데 따로 나 혼자 샐러드 챙겨 먹겠다고 만들고 있으면 손도 많이 가고 음식도 남기 일쑤였다.



이제부터 저녁 메뉴 고민은 어떤 종류의 샐러드를 만들 것인가 하는 걸로 바뀌었다.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나도 양껏 먹고 남편도 먹이니까 채소를 많이 사쟁여도 별로 아깝지 않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변화인 것 같다.



처음에 무턱대고 탄수화물 끊겠다 했을 때는 저 인간이 또 며칠이나 가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싫다고 해도 내가 밥에 반찬을 곁들인 한식은 안 차려줄 테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샐러드 먹고 건강해져서 백세시대에 슬기롭게 적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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