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없이 놀아봐서 한이 없어서 그렇다고..
아침 등교 시간이 끝난 때라 학교 앞은 한적했다. 그 시간에 학교에 가는 듯한 학생들도 한 두 명 보이긴 한다. 좀 늦은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헐레벌떡 뛰어간다. 그렇지만 지각이 분명해 보이는 중학생들은 성급해 보이지도 않고 굉장히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학교에 향하는 경우가 많다.
등교시간은 끝났지만 교통봉사대원 분들의 근무시간은 끝이 아닌지 아무도 없는 신호등에 서서 깃발을 들고 서계셨다. 나는 차 안에서 신호대기를 받고 있었다. 저 멀리서 동네 중학교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자태라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여학생은 점점 가까워져서 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동네 양아치(?)들이 걷는 듯한 팔자걸음 비슷한 자세로 걷는 것도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담배를 문 모습도 역시 남다르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담배를 입 옆쪽으로 꼬나물고 매우 능숙한 폼으로 그리고 아주 맛있다는 표정으로 피우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담배를 계속해서 물고 신호등에 섰다. 바로 옆에는 노인교통봉사대원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께서도 여학생을 힐끔 쳐다보시는 듯했지만 별다른 제재는 취하지 않았다. 하긴, 선생님도 부모님도 아닌데 괜히 관여했다가는 요즘 같은 세상에 좋은 꼴 볼리도 없다.
이내 담배를 다 피운듯한 여학생은 아주 자연스럽게 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지근지근 버려진 꽁초를 밟아주고 신호등을 건넜다. 과한 팔자걸음으로.
아침의 이 풍경에 사로잡힌 나는 그 여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바라봤다. 다행히 차 안이라 선팅도 되어있어서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웬걸,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는데 굉장히 곱다. 예쁘다. 딱 그 나이대의 상큼함과 생기가 느껴진다. 하얗고 청순한 이미지다. 화장하지 않아도 빛날 것 같은데 과하게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괜히 내가 다 안타깝다.
저렇게 예쁘고 고운 여중생이 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각을 하고, 좀 놀아본 언니처럼 행동하는 걸까. 부모님도, 선생님도 참 애 많이 태우겠다. 공부 열심히 안 하고 그 모습 그대로 착하게만 자라도 남자들이 줄 설 거 같은데, 어쩌다가..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다. 남의 딸이야 어떻게 자라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는 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풍경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얼마 후에 어쩌다 담배 냄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머릿속에 그 담배 꼬나문 여중생이 떠올라서 남편에게 신나게 이야기했다. 요즘 것들이란.. 하는 꼰대스러운 말투로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인상을 쓰면서 나에게 동조하는 듯한 표정으로 들었다.
"근데 그 여학생 행동과 걸음걸이만 불량해 보일 뿐이지 얼굴은 진짜 예쁘더라. 하얘 가지고 청순하게 생겼어."
"그래? 그런 애들이 나중에 시집은 더 잘 갈 거다."
흠.. 남자들이란. 그전에 했던 모든 상황은 다 희석되고 남은 건 예쁜 외모뿐인 듯하다.
학창 시절에 제대로 놀아보지도 않았고,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은 나는 괜한 반발심이 차오른다. 그런데 뭐 딱히 거기다 대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대화는 마무리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놀아본 애들이 나중에 시집은 더 잘 간다는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봤다.
아 맞다! 김창옥 강사님 강의 영상에서 본 것 같다.
그의 논리는, 학창 시절 좀 놀아본 여자친구가 시집 잘 가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는 바로 원 없이 놀아봐서라고 한다. 어려서 하고 싶은걸 다 해봤기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봤자 큰 차이 없다는 깨달음을 일찍 통달하고 한 남자에게 잘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주변에 놀아본 친구가 많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깊이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이 좀 까져서 공고 다니는 오빠랑 사귀고 술담배도 하고 부모님 속을 썩였는데 고3 때 뒤늦게 정신 차려서 공부에 집중하더니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다녔다. 우리들은 대학 가서 술문화에 빠져서 정신없이 놀고 청춘을 낭비할 때 그 친구는 착실하게 공부하더니 졸업도 하기 전에 공무원에 합격했다. 지금은? 대기업 다니고 순박하고 말 잘 듣게 생긴 남편 만나서 골프 치러 다니고 두 딸내미 영유 보내고 자식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잘 산다.
내 주변에서 이를 입증할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김창옥 강사님 논리가 틀린 말은 아닌듯하다. 그래도 노는 것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면서 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내 친구는 부모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친구를 붙잡으려고 노력하셨다.
아침부터 맛있게 담배를 피우며 느지막이 등교하는 그 여중생이 얼른 마음 잡고 선한 길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아줌마의 오지랖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