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해서 춤이라도 추고싶다
정수기라는 가전제품은 언제부터 이 시대의 필수품이 되었을까?
내가 직접 살림을 하게 된 건 결혼한 이후부터였다. 그전에는 정수기의 필요성에 대해 별로 실감하지 않고 살았다. 집에 정수기가 있었나 없었나도 관심영역 밖이었다.
원체 물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물은 있으나 없으나 목마르면 목 축을 음료 마시면 되지 하는 마인드였다. 그런데 살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니 물은 정말 일상에서 그리고 가족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기본 중의 기본적인 필수재였다.
살림 장만할 때 친정엄마는 너 편하게 꼭 정수기 냉장고를 사라고 강권하셨다. 그 당시 정수기냉장고가 처음 출시됐을 때라 조금 생소하긴 했는데, 신기하기도 했고 편리하게 사용했다.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이사를 몇 번 하게 되면서 냉장고를 바꿔야 했고 그때는 정수기 냉장고가 아닌 오브제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최신형 냉장고를 들이게 되었다. 당연히 따로 정수기를 마련해야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정수기가 그렇게 비싼 줄은.
렌털을 해볼까 했지만 계산해 보면 그냥 한 번에 구매하는 게 지출을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머리 써서 계산해 보면 렌털이 장기적으로 훨씬 더 비싼 축에 속하는데 왜 사람들은 정수기를 렌털할까 의문까지 들었다. 그렇게 쿨하게 정수기를 그냥 구매해 버렸고, 이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돼버렸다.
1년 정도까지는 별 탈 없이 사용한 것 같다. 그런데 2년 차 접어들 때부터였나, 한 번씩 정수기가 말썽이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정수기에서 물이 자꾸 새는 것이었다. 물이 새서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증상이 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전자제품에서 물이 샌다는 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당장 A/S를 신청해서 수리했다.
보통 사람들도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왜 이렇게 전자제품 수리 서비스 신청하는 일이 너무너무 귀찮은지 모르겠다. 해당 회사 홈페이지에 가입하라는 둥, 제품번호와 시리얼 넘버를 입력하라는 둥 갖가지 입력해야 할 것도 많고 출장 방문이라면 시간 약속도 잡아야 하고 여간 머리 아픈 게 아니었다.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대기업 로고를 달고 있는 이 정수기는 두 번이나 고장이 나서 수리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비용을 내야 했다. 고치러 오시는 기사분들이 다들 왜 렌털을 안 하셨냐는 질문을 하셨다. 렌털을 하든 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렌털을 하면 쓰는 동안에는 고장이 발생할 때 무상수리 서비스가 기본이고 여차하면 교체 서비스까지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정수기가 고장 나서 수리를 부르는 것도 귀찮았지만, 더 귀찮은 건 3개월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정수기 관리 서비스를 받는 일이었다. 담당 매니저랑 약속을 잡고 집에 있어야 하는데, 이게 내가 현재 일을 안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근무할 때는 항상 출퇴근 시간 피해서 약속을 잡느라 머리가 아팠다.
한 번 매니저가 오면 3-40분을 꼼짝없이 낯선 사람과 함께 집에 있어야 하는데, 나만 그런가 이 시간이 상당히 불편했다. 관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예 다른 방에 가 있기도 그렇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도 애매해서 이일 저일 하면서 집안을 헤매곤 했다.
정수기 관리에 수리에 계속 신경 쓰다 보니 어느 날부터 정수기에 정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고장이 나서 말썽이 난 것이다!
또 그 귀찮은 수리 서비스 신청 과정을 거치고 기사님을 불렀고 10만 원 상당의 수리비를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나는 그냥 수리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더 이상 이 정수기 쓰고 싶지 않다고 수리기사님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 기사님이 또 덧붙이신 내 가슴의 비수를 꽂는 한마디.
"보통 정수기는 렌털을 하시는데, 구매를 하셔서 비용이 발생하네요.."
네네.. 안다고요 알아!
어차피 3개월마다 받는 관리서비스도 귀찮았고 이 참에 그냥 물을 사 먹자 싶었다. 쿠팡에서 주문하면 24시간 이내에 생수가 배달되는 세상인데 뭐 하러 애물덩어리 정수기를 데리고 살 거냐 말이다.
막상 물을 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려웠다. 결혼 이후로 내내 정수기를 집에 두고 사용했으니 한 번도 마실 물을 따로 사야 한다는 생각을 못해봤다. 자연드림 회원이라 정기적으로 생수를 한 상자씩 받는데, 그건 외출용으로 요긴하게 쓰는 정도였다. 물을 사 마셔야 하다니.. 그것도 매번.. 얼마나 귀찮은 일일까.
사서 며칠 마셔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마음에 드는 가격과 브랜드의 생수를 구매하면 다음날 집 앞에 와있고 집 안 적절한 곳에 배치해 두면 2주 정도는 너끈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마시기만 한다면 큰 걱정이 아닌데 요리할 때도 정수기 물을 쓸 때가 은근히 많아서 감당이 안 되겠다 싶었는데, 생수 물만 써도 대충 감당할 수 있었다. 내가 요리를 아주 즐겨하지도 않으므로.
물을 사서 먹는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되겠다 싶어서 기존에 고장 난 정수기는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고물을 어디 당근에 내다 팔 수도 없고, 렌털도 아니라 그냥 버려버리면 끝이다. 그런데 버리자니 정수기에 연결된 직수관들을 어떻게 분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혼자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답답해서 관리해 주시던 매니저에게 연락드려봤더니 그거 고객님이 직접 하면 절대 안 되고 철거 신청을 따로 해서 기사님을 '또' 불러야 한다는 거다. 기사님을 부르면.. 또 비용 발생?
하아.. 이놈의 정수기는 고치는데도 돈, 버리는데도 돈...
이사, 철거 목적으로 방문기사 신청을 또 해두고 기다렸다. 남편 말로는 철거에도 7,8만 원 들 수도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3만 원만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갖다 버리려면 또 수거비를 내야 한다. 간곡하게 철거 기사님께 가져가서 버려주실 수 있냐고 부탁드렸다. 기사님께서 흔쾌히 받아주셔서 정수기를 철거하고 가지고 가주셨다. 기쁜 마음으로 3만 원을 결제해 드렸다.
철거하는 와중에도 이 놈의 정수기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진다. 내부에 뭐가 단단히 고장이 나도 났나 보다. 회생 불능이다. 기사님도 의문을 표한다. 이거 아직 새 제품이고 쓸만한데 참 아깝네요, 하시는데.. 아까우면 뭐 하나 고물이 돼버렸는데. 한시라도 빨리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꼴도 보기 싫은 정수기를 없애고 있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니 왠지 부엌이 한결 정돈된 느낌이다. 일반 생수병으로 마시는 물에는 미세플라스틱이 있다고 하니 그건 우리 부부가 마시고 아이는 웬만하면 자연드림 물로 마시도록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물을 사다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고, 또 다른 귀찮음에 몸서리치며 정수기 렌탈을 알아보러 다닐지도 모르겠다. 그전까지는 당분간 견뎌보련다. 그전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정수기 광고가 눈에 새삼 밟힌다. 이참에 BTS가 광고하는 정수기로 갈아타볼까.. 외국도 다 정수기를 사용하나? 어쩌다 우리나라는 정수기 판매 왕국이 되었지? 정수기 산업 자체가 굉장히 큰 영역인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엄마가 매번 수돗물로 끓여준 보리차물 마시고 살았는데.
살다 살다 정수기 때문에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을 줄이야.
내 돈만 갉아먹고 떠나버린 정수기. 버리고 나니 백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