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도 어린 걸 좋아하나 봄
아이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활달하고 장난기가 넘친다. 한 마디로 반에서 핵인싸를 담당하는 아이다. 물론 이런 친구는 내 아이와 친하지는 않다. 아이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 친구는 열 살 어린이답게 자기 자랑을 대놓고 많이 하는 편인데, 그 자랑거리 중 하나가 자기 엄마, 아빠는 굉장히 젊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 응? 뭐지? 엄마 아빠가 젊다는 걸 왜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말을 듣고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 아이는 왜 엄마, 아빠가 젊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게 된 걸까.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형성이 된 건지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을 전해 들은 자리에 있던 엄마들 모두가 다 40대였다. 해봐야 이제 막 40대가 된 나 같은 엄마들이 대부분이고 늦게 결혼해서 40대 후반을 바라보는 엄마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 엄마, 아빠는 30대라고 했다. 뭐, 30대라고 해봐야 초중반이 아니라 꽉 찬 30대인 게 분명했는데 그게 그렇게나 자랑거리였을까.
요새는 결혼 연령 자체가 30대 후반인 세상 아닌가!
이런 세상에는 30대 후반에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초등생 학부모라는 사실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나 보다.
서른 살에 나는 구 남친, 현남편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도도한 척했지만 왜 사귄 지 3년이 넘어가는데 결혼 얘기가 안 나오는지 나 혼자 애달아했다. 후에 더 놀다 결혼할걸 두고두고 후회하긴 했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 못 이겨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는데, 그 당시 내 삶의 숨은 목표 중 하나는 40살이 되기 전에 학부모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마흔이 되기 전에 초등학교를 꼭 보내고 싶었다. 왜 그따위 인생목표를 세웠는지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나.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놀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집안의 막내로 언니, 오빠가 다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이었다. 그 당시 나에겐 대학생이란 엄청나게 큰 어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 어른을 언니로 두고 있는 친구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을 언니, 오빠로 두고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더 놀라운 건 그 친구의 엄마를 보고 나서였다. 엄마를 딱 만났는데, 그때의 내 눈에는 딱 할머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할머니랑 아주 비슷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해봐야 40대 후반이거나 50대셨을것 같은데, 뭐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어린 나에게는 그렇게 비쳤다. 친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날 학교에서 벌어졌다. 나는 또 다른 친한 친구 한 명에게 조용히 털어놨다. 놀러 갔던 친구 엄마가 할머니 같다고. 왜 그렇게 철없는 짓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진 않는데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혼자 끙끙 앓다가 어렵게 털어내듯 아주 조용히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교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비밀을 지켜줄 거란 내 기대와 달리 아이들 사이에서는 누구 엄마가 할머니처럼 늙었다는 말이 단번에 퍼졌고 그 근원지가 어딘지 따지기 시작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정의로운 척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정의감에 불탄 반에 분위기를 리드하는 친구들이 나에게 와서 따졌다.
네가 뭔데 남의 엄마를 할머니라고 부르느냐고, 너 그거 진짜 나쁜 거라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꺼번에 서너 명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으며 반성했다. 남의 엄마를 함부로 늙었다고 할머니라 칭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더불어 그 당시 내가 뼈저리게 깨닫게 된 한 가지는 나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늘 본인이 풋풋한 20대에 미래를 준비하고 꿈꾸던 시절 아빠를 만나 본의 아니게 아이가 생겼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찍 시집을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그 시절의 젊은 엄마에게 쫓아다니면서 아빠랑 제발 결혼하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런 신세한탄을 왜 나에게 쏟아붓는지 이유도 모른 채 가만히 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긍정 한 스푼의 결말로 맺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어린 시절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보니 자식 또래 엄마, 아빠들에 비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다는 것만은 자랑스럽다고 했다.
"얘, 너는 엄마가 이렇게 젊고 혈기왕성하잖아. 그것만으로도 복 받은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는데 딱히 와닿지 않았다. 대체 엄마가 젊어서 나에게 득이 되는 게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당신 말씀대로 철이 안 든 상태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그런지 그저 먹고살기에 바빴고 학원도 내주고 남들 시키는 만큼 교육을 시켜주긴 했으나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결핍을 많이 느꼈다. 지금의 내 나이에 엄마, 아빠는 이미 중고등학교 학부형이었는데 부모로서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육아서를 읽고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잘 먹고, 입히고, 가르치는 게 전부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좀 뒤늦게 결혼해서 나이 든 부모님이라고 해도 그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했을 것이고 더 안정적인 부모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무턱대고 첫사랑이랑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할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자신의 인생관도 좀 성립한 후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더라면 엄마, 아빠는 훨씬 더 나은 부모가 되지 않았을까. 다분히 이런 측면에서 나는 부모님이 젊다는 사실이 하등 자랑할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물론 지금은 손자가 초등학생이 될 나이에 친정부모님은 60대 청춘(?)이니 나도 감사하긴 하다. 주변에 보면 자식 키우느라 바쁜데 부모님이 연로하시고 병환이 생기니 대학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아직 두 분 다 건강하고 자기 관리도 잘하셔서 그런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삼십몇 살 밖에 안돼서 엄청 젊지롱~" 하고 자랑하는 열 살 어린이의 가치관은 어떤 경로로 형성된 건지 정말 궁금한데, 아무래도 그 부모님이 요즘 세태치곤 젊은 축에 낀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친 게 아닐까 싶다.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는 세상에 부모가 어리고 젊어서 팔팔하다는 사실만으로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젊은 부모에 비해 나는 세 살이나 더 먹었고 40대 딱지를 달아버렸으니, 서른 먹고 시집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마음먹고 급하게 서둘렀는데도 젊은 부모 축에 끼지를 못하니 내 노력에 비해 아쉬운 결과지만, 그래도 잘 먹고 열운동 하면서 애를 위해 늙은(?) 부모는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경제력도 받쳐줘야 하고 육아 공부도 해야 하고 좋은 음식도 먹여야 하고 독서 습관도 잡아줘야 하고 정서도 신경 써야 하고.. 또또 거기에 젊음까지 유지해야 하다니, 요즘 부모 해 먹기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