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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Sep 26. 2024

도시락 싸기 싫어서 일하러 나갑니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만가지 이유 중 하나

남편 점심 도시락을 싼 지 2년 차다. 급식 제도가 시작되기 전 과거 우리네 엄마들은 매일 아침 도시락 두, 세 개도 거뜬히 싸는 게 일상이었다. 그 당시의 엄마들에게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그때 엄마들은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 당시에는 또 다들 그게 당연한 문화였고 힘들긴 해도 엄마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였기에 그런대로 견뎌내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같은 시대에 주변에서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도 학교 가면 급식을 먹고 오는 마당에 남편 도시락이라니. 유튜브에 찾아보면 그래도 매일 아침 정성껏 남편 도시락을 싸는 영상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이렇게 헌신하는 아내들도 있나 싶은게 한 줌의 위로가 되었고 메뉴 선정에 참고하기도 했다.


그전에는 늘 외식을 하거나 배달 포장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해야 했기에 남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점심 한 끼 때문에 위장에 무리가 오고 건강에 무리가 온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매번 양념이 세고 강한 바깥 음식을 하루도 안 빼먹고 먹으니 젊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가니 몸에서 반응이 올 수밖에.


위통증 때문에 잠도 못 잘 지경에 이르자, 나는 식단을 좀 더 건강하게 챙겨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남편 도시락을 챙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이벤트성으로 해주었는데 남편은 굉장히 만족해했고 하루 이틀이 점점 늘어나 결국 일주일 내내 도시락을 싸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접 반찬과 메인 메뉴를 만들 때도 있었지만 그냥 반찬가게 메뉴를 사다가 그대로 다시 데우기만 해서 싸줄 때도 많았고 전날 쿠팡프레시에서 급하게 주문한 고기반찬을 소분해 두었다가 싸줄 때도 많았다. 유투버들처럼 아예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내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수제도시락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굉장히 만족해했고 이후로는 위통증을 호소하는 일도 크게 줄었다. 아니 위염이 아예 사라진 듯했다.


아무리 대충 싸는 거라고 해도 바깥 음식 먹는 것 보다야 내가 직접 싸주는 음식이 건강에는 훨씬 낫다는 걸 체감하게 되니 그 후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어쩌다보니 이게 루틴이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나는 내일 도시락 메뉴는 또 뭘 싸야 할지 끝없는 고민이 시작되었고 장 볼 때도 평소에 보던 것보다 더 고민이 늘어났고 늘 머리를 싸매면서 메뉴를 선정해야만 했다.


아침부터 무덥고 습한 여름 시즌이 오면 도시락 메뉴 선정이 더 어렵다. 더운 날씨에도 덜 상할 수 있는 메뉴로 고민을 해야 하고,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의 나지만 아침부터 부엌에 서서 제육볶음이라도 만들고 있으면 땀이 뻘뻘 났다. 그러면서 점점 현타가 짙게 찾아온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남편 도시락을 싸야 하나.


처음에는 선의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의무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가끔 일이라도 있어 도시락을 못 싸주는 날이면 남편은 뭘로 또 점심을 때웠는지 걱정하게 되고 괜히 눈치까지 보인다. 집에 있으면서 일하느라 고생하는 남편 점심도 못 챙겨주는 못난 아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가끔 싸주던 도시락에서 무척 고마워하던 남편도 이제는 슬슬 오늘 메뉴는 뭐냐고 물어보고, 먹고 나서도 딱히 잘 먹었다는 코멘트나 피드백이 없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도 안 먹고 출근하는 남편이라서 점심 전까지 허기질까 봐서 도시락에 더불어 구운 계란과 견과류 그리고 간단히 딸기잼 토스트까지 만들어서 넣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중에 뭐라도 하나 빠지면 이제 서운해져 버렸다고 할까.


최근에는 날도 덥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고 나면 아이 아침밥 먹은 뒤처리까지 해서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올라왔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어느새 남편에게 도시락 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색을 내기도 했고, 오늘 아침엔 정말 힘들었다고 하면서 내심 알아주기를 바라는 티를 좀 냈다. 그런 내 말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후에 싸울 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도시락 싸지마, 언제 내가 싸달라고 했어? 그리고 네가 맨날 싸면서 힘들다고 하면 그 소리를 듣는 내 기분은 어떤지 생각은 해봤어? 안 싸면 되지 왜 힘들다고 징징대?'


물론 서로 화가 난 상태에서 한 말이었고, 기분 나쁜 말들이 쌍방으로 오가긴 했지만 굉장히 기분이 상했다.

나는 뭐 하려고 아침부터 남편 도시락을 싸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지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독박육아로 아이 키우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남편의 매 끼니까지 다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옥죄어오는 기분까지 들었다.



어느 날 지나영 존스홉킨스대 교수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나의 수고와 시간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무료 서비스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나의 가치를 스스로 존중하지 않고 무료 서비스처럼 계속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다 보면 나의 수고는 점점 무가치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가족처럼 매우 가까운 사이에서 더 자주 벌어진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노력을 공짜 취급하고, 심지어는 언어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학대하면서도 계속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부모이건 형제이건 배우자이건 간에, 스스로에게 가족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혹 가족 관계가 끊어지더라도 나는 더 이상 학대당하는 자리에 계속 있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그 자리를 떠나도 괜찮다고 허락해주어야 한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나이가 들고 예전만큼의 건강과 체력과 점점 멀어져 가는 남편의 식단을 챙기는 일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내 수고와 시간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가 도시락 싸는 일을 멈추면 남편은 전처럼 또 외식에 의존해야 할 거고 그러면 다시 위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을 텐데 미리 걱정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 이렇게 평생 남편 끼니를 챙기는 일을 아침마다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살아야 하는가.


그런 나에게 지나영 교수의 글귀는 커다란 참고가 되었다. 내 시간과 노력은 무료 서비스도 아니고, 공짜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내가 참아야 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2년간 남편 식단을 챙겨줬으면 그래도 오래 버틴 거다. 이제는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점심을 좀 안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저녁밥 한 끼만큼은 건강에 좋은 식단으로 구성해서 챙겨주면 될 일 아닌가. 남편의 세끼 모두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일터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버렸다. 심지어 남편도 내가 다시 복직하면 자기 도시락도 못 싸줄 텐데 하면서 아쉬움을 크게 표했다.


남편 도시락을 싸주고 나면 내 점심밥은 대충 때우기 일쑤다. 휴직하면 아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면서 브런치나 먹고 다니는 여유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건만 그것도 어쩌다 가끔 분기별로 있는 이벤트일 뿐 그렇게 자주 만날 일도 없다. 거의 매일을 대충 집에 있는 걸로, 최대한 돈 안 드는 범위에서 해결하는 게 일상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늘 먹던 점심 급식이 절실하게 그리워질 정도다.


이렇게 속으로 불평불만 하면서도 오늘 아침에도 나는 남편 도시락을 싸주었다. 중간에 먹을 간식으로 견과류와 삶은 계란, 모닝빵을 챙겨 넣었다.


내가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부끄럽지만 이제 도시락을 싸고 싶지 않아서이다. 일을 하게 되면 이제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될 매우 적절한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남편의 건강을 챙기고 돌보는 일은 나에게 주어진 여러 의무 중 하나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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