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암실작업을 한 것
딸: 아빠, 아빠 사진 들고 여기저기 찾아 뵈었을 때 특히, 외국분들이 좋아하셨던 것은 역시 탈 사진이에요.
아빠: 아무래도 그게 아주 강렬한 느낌을 주자나.
딸: ‘포토숍으로 작업을 한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암실에서 필름을 분리해서 한땀한땀 작업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깜짝 놀라더라구요.
아빠: 그렇지 아무래도 컴퓨터 작업으로는 얻기 힘든 분위기지.
딸: 어떻게 한건지 좀 알려주세요. 비법공개~
아빠: 비법은 무슨~ 근데, 맛집들 보면 아주 자세하게 다 알려주지 않던? 왜 그렇게 다 공개를 할까 싶지만 그렇게 다 세세히 이야기를 해줘도 정말 그 공들임을 쉽게 따라할 수 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똑같이 한다고 해도 똑 같은 결과를 얻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꺼야. 자 비법공개 들어갑니다. 잘 들으세요 ㅎㅎㅎ
딸: 우와우와~
아빠: 사실 그 탈들 사진 찍게 된 건, 심우성 선생님이랑의 인연이 시작이었어. 그분이 민속학계에선 꽤 유명하신 분이거든. 어느 날 심선생님이 나무로 만든 탈 33종을 이미 재현해놓으셨다며, 그걸 사진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하셨지. 그게 내 탈 사진 인생의 시발점이었단다.
딸: 오, 33종! 와우, 숫자부터가 뭔가 의미심장한데요? 근데, 그걸 왜 굳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으셨던 거예요?
아빠: 탈은 원래 옛날엔 탈놀이, 굿판, 마을 행사 때 쓰던 거지. 그런데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사라지고,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거든. 심우성 선생님이 그걸 복원해놓으셨으니,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겠다 싶으셨던 거지. 사진은 그 순간의 모습을 영원히 남길 수 있으니까. 그 사진이 시작이었지. 탈, 탈춤을 찍게 되면서 진짜 전국을 누볐지. 서울 송파, 양주, 남양주, 그리고 통영, 고성까지. 각 지역마다 탈이 다 다르거든. 양주놀이, 가산오광대, 통영 오광대, 고성 오광대, 진주 오광대… 세 군데가 모여 있는 곳도 있고, 각자만의 색깔이 있지. 그걸 하나씩 찾아가서 찍었단다.
딸: 와, 아빠 완전 ‘탈로드’였네요. 근데, 탈이 그렇게 많아요? 사실, 저는 하회탈밖에 모르는데… 그거 말고도 엄청 많아요? 그리고 이름도 다 특이하네요. 산대놀이, 오광대… 오광대는 혹시 오징어 게임이랑 관련 있나요? 아니면 오광(五光)처럼 다섯 빛깔로 화려한 건가요?
아빠: 오징어 게임이랑은 전혀 상관없고, 오광대는 ‘광대’들이 나와서 펼치는 탈놀이야. 지역마다 이름도 다르고, 탈의 모양도 다르고, 쓰임새도 달라. 하회탈은 네가 아는 것처럼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별신굿 탈놀이, 산대놀이, 오광대 등등 종류가 많아. 심지어 같은 탈이라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지.
딸: 오, 진짜 신기하다. 그러면 아빠, 그 탈들 찍으면서 제일 신기했던 점은 뭐였어요? 혹시 탈마다 숨겨진 비밀 코드 같은 게 있나요? 아니면, “이 탈은 꼭 밤에 보면 안 된다” 이런 도시전설 같은 거?
아빠: 음, 탈마다 다 사연이 있지. 예를 들어, 옛날엔 탈놀이 끝나면 그 탈을 다 불태워버렸대. 왜냐면 탈에 귀신이 깃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놀이가 끝나면 깨끗이 태워 없애는 거지. 그래서 옛날 탈이 거의 남아 있질 않아. 지금 우리가 보는 탈들은 대부분 복원된 거야. 그걸 복원할 때, 지역의 어르신들이 예전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어릴 때 봤던 탈은 이랬다” 하면서 만든 거지.
딸: 그렇게 복원된 탈들이라면, 진짜 옛날 탈이랑은 좀 다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요즘은 탈놀이 끝나고 불태우는 일도 없겠죠? 아, 요즘은 환경보호 때문에라도 불태우면 안 되니까… 그럼 탈도 점점 예뻐지는 거예요?
아빠: 맞아, 요즘은 탈을 불태우지 않으니까, 점점 더 예쁘게 만들고, 색칠도 화려하게 하지. 옛날에는 자연 염색이나 흙, 먹 같은 걸로 색을 냈지만, 지금은 아크릴 물감도 쓰고, 재료도 다양해졌지. 그리고 탈을 만드는 기술도 점점 발전해서, 모양도 더 정교해지고, 색깔도 다채로워졌어. 하지만, 탈을 만들 때는 그 지역의 전통과 역할을 잘 살려야 해. 그 역할에 맞는 표정, 색깔, 크기 같은 게 정해져 있는 거야. 하지만 요즘은 창작 탈도 많아져서, 만드는 사람의 개성이 들어가기도 해. 탈 만드는 장인 분들 따라 작업실에 가본 적 있는데, 그 섬세함과 정성에 감탄했단다. 나무를 깎고, 흙을 바르고, 색을 입히고, 마지막엔 눈썹 하나 점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리더라고. 그걸 보고 있으면, 그냥 탈이 아니라 진짜 예술품이구나 싶었지. 하회탈의 ‘양반탈’은 정말 표정이 살아 있고, 통영 오광대의 ‘홍백양반’은 유쾌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지. 그리고 ‘방상시탈’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져서 인상적이었어. 각각의 탈이 다 개성이 있어서, 딱 하나만 고르긴 어렵지만, 이 셋은 정말 기억에 남는다.
딸: 오, 양반탈, 홍백양반, 방상시탈… 이름만 들어도 뭔가 스토리가 느껴져요. 방상시탈은 다른 탈과 좀 달라보여요.
아빠: 이게 진짜 독특한 탈인데, 원래 궁중에서 나례나 장례 때 악귀를 쫓으려고 썼던 거야. 임금님 행차나 외국 사신 맞이 같은 큰 행사 때, 붉은 옷 입고 가면 쓴 방상시가 네 명씩 나와서, 다른 가면 쓴 사람들과 함께 막 소리도 지르고, 불이나 색깔로 위협도 하면서 악귀를 쫓는 거지. 약간 연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무사태평을 비는 중요한 의식이었어. 장례 때는 발인 행렬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묘지에 도착하면 시신 들어갈 자리의 잡귀를 쫓았대.
딸: 오, 그럼 진짜 옛날부터 있었던 거네요! 그 탈 실제로 본 적 있어요?
아빠: 나는 심이석선생님이 복원하는 모습을 찍으면서 알게 된거지. 실제 방상시 탈은 1970년에 창덕궁 창고에서 발견됐어. 길이 78cm, 너비 73cm나 되는 대형 탈이었지. 소나무에 얼굴을 파고, 네 개의 눈, 입, 코, 눈썹까지 새겨져 있어. 웃는 얼굴에 깊은 주름, 커다란 귀도 인상적이고. 지금은 거의 나무색이지만, 원래는 눈썹에 녹색이랑 붉은색도 칠해져 있었대.
딸: 와… 네 개의 눈이라니! 완전 독특해요. 근데 이 큰 걸 진짜로 썼던 거예요?
아빠: 아마도 실제 장례에 쓴 건 아니고, 실물 크기로 만든 모형이거나, 궁중에서 벽에 걸어두고 의식용으로 썼던 것 같아. 방상시 탈은 장례나 민속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지.
딸: 그렇구나. 민속 연구도 연구인데, 예술적으로도 너무 매력적이에요. 근데 아빠, 그럼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탈들은 몇 개나 돼요? 혹시 “전국 탈 개수 세기 챌린지” 같은 거 해보신 적 있으세요?
아빠: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몰라. 왜냐하면, 지역마다 비슷한 탈도 있고, 전혀 다른 탈도 있거든. 어떤 학자들은 250개에서 300개 정도로 추정해. 내가 전국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그 정도가 맞는 것 같더라. 탈마다 이름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고, 심지어 같은 마을에서도 조금씩 다르게 만들기도 하니까.
딸: 와 진짜 많네요. 근데 제가 궁금했던 걸로 돌아가서 아빠는 왜 굳이 암실 작업을 통해서 그런 탈 사진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 그냥 찍어서 바로 인화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다들 포토샵 한 번이면 뚝딱인데, 아빠는 왜 그렇게 힘들게, 막 암실에서 사진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 좀 알려주셔야 해요. 저도 이제 아날로그 갬성 좀 알아야 하잖아요!
아빠: 좋은 질문이네. 사실 나도 처음엔 그냥 기록 사진처럼 찍었어. 탈이라는 게 워낙 오래된 문화재라서, 남아 있는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찍다 보니까, 이게 그냥 복사하는 기분이 들더라고. 남이 만든 탈을, 남이 만든 연희를, 내가 카메라로 그냥 옮기는 거지. 그게 내 사진인가? 내 작품인가? 그런 고민이 계속됐지. 단순히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나의 작품이 아니라고 느꼈어. 기존에 만들어진 탈이나 연희 자체는 이미 다른 이들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단순히 복사하는 것만으로는 예술적 해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거지. 그래서 암실 작업을 통해 사진을 재창조함으로써, 나만의 사진적 해석과 독창성을 담으려고 한거야. 이런 암실 작업은 남들이 잘 하지 않은 방식이었고, 포스터리제이션 등 아날로그 암실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거지.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어. 암실이 일종의 마법 공간이었지. 그냥 찍은 사진이 현실의 복사본이라면 암실에서 내가 직접 톤을 분리하고, 색을 조합하고, 여러 장의 필름을 겹치고, 포스터리제이션 같은 기법을 쓰면서, 내 해석이 들어간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가 돼. 남들이 본 적 없는, 나만의 시선이 담긴 사진을 만들고 싶었어.
딸: 오, 아빠 완전 마법사! 근데 그거 진짜 어렵지 않아요? 그냥 필름 넣고 뽑는 게 아니라, 막 필터도 만들고, 현상액도 섞고, 타이머도 재고…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데, 아빠는 그걸 왜 굳이 다 했어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 이런 자존심 때문이에요?
아빠: 자존심도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직접 손으로 만지고, 내 감각으로 조절하는 그 과정이 너무 좋았어. 사진 한 장이 내 손끝에서 완성된다는 느낌. 그게 암실 작업의 매력이야. 물론 힘들고, 실패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공했을 때의 기쁨도 컸지. 아빠가 사용한 기법은 포스터리제이션, 톤 세퍼레이션이니, 릴리프… 같은 것들이야. 포스터리제이션은 쉽게 말하면, 색이나 명암을 단계별로 뚜렷하게 나누는 거야. 흑백 사진에서 검정, 회색, 흰색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딱딱 끊어지게 만드는 거지. 톤 세퍼레이션은 명암을 여러 단계로 쪼개서, 디테일을 살리는 작업이고, 릴리프는 입체감이 더 살아나게 하는 효과야. 이런 기법들을 암실에서 손으로 직접 조절하면서, 내가 원하는 느낌을 찾아가는 거지.
딸: 아빠는 한국의 다크룸 마스터예요! 제가 휴스턴에 있는 사진 전시센터 (Houston Center for Photography)의 센터장을 만났을 때, 거기 센터장이 아빠 사진을 보고 미국 사진계에서 ‘다크룸의 마스터’라고 불린 앤설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를 언급하면서 아빠가 그런 사람이라고 했어요. 미국 사진사에서 아주 전설적인 사람이라던데요?
아빠: 그랬구나. 앤설 아담스는 사진계에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야. 흑백 풍경사진과 암실 인화 기술의 대가지. 그 사람의 암실 작업 중에 유명한 것으로 요세미티 국립공원 사진이 있어. 그런 미국 서부의 흑백 풍경사진으로 유명하지. 앤설 아담스는 암실에서의 탁월한 기술력과 예술적 감각으로 ‘다크룸의 마스터’라는 별칭을 얻었고, 그 사람의 흑백 프린트는 지금도 사진 예술 분야에서 아주 교과서적인 위치를 차지하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지. 아빠는 사진을 이론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진 작가는 아니어서 다른 외국 작가들 언급하면서 자기의 지식만 뽑내려드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주었다니 영광이구나. 무조건 싫어하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딸: 근데 그 분은 흑백 사진이고 아빠는 칼라 사진이니깐 아빠가 살짝 한수 위? 게다가 그때는 한국에 그런 작업하는 사람 거의 없었다면서요? 혹시 “내가 한국에서 최초다!” 이런 자부심도 있었어요?
아빠: 솔직히 있었지. 그때는 암실에서 컬러 포스터리제이션까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 내가 그 작업을 할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 근데 그만큼 힘들어서, 아무나 못 따라 했던 거야. 그래서 더 애착이 갔고, 내 작업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게 1990년대이고, 30점을 만들어서 전시를 했지. 많은 분들이 와 주셨고, 비슷한 작업을 했던 분들은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니까 더 많이 축하를 받았었지.
딸: 근데 왜 그만 두었어요? 30점이 아니고 300점쯤 만들지~
아빠: 어이쿠! 그거 완전 노가다야. 그리고 암실 약품이 아주 위험하지. 사실 다 독약이야 독약.
딸: 그래서! 엄마랑 행복하게 오래 살려고 그만했군요?
아빠: 그래! 그렇다고 하자 ㅎㅎㅎ 그리고, 점점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하면서 아빠도 시대를 따라갔다고 봐야지. 아빠도 요즘엔 다 핸드폰으로 찍자나. 우리 딸이 사준 삼성 핸드폰이 제일 좋더구만.
딸 : 아빠, 그건 완전 인정! 삼성 핸드폰이 하도 화질이 좋아서 덕질하는데 쓰는 폰이지나요. 근데 아빠가 봤을 때, 디지털이랑 암실 작업, 뭐가 더 멋있어요?
아빠: 솔직히 말하면, 각자 장단점이 있어. 디지털은 빠르고, 수정도 쉽고, 결과도 예쁘게 잘 나오지.
근데 아날로그 암실 작업은 손맛이 있지. 내가 직접 빛을 조절하고, 화학약품으로 현상하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생기는 효과들… 그게 진짜 재미였어. 요즘은 요즘데로 그만큼 새로운 감각으로 멋진 사진을 만들기도 하잖아. 세상이 변한 거지, 뭐.
딸: 아빠는 암실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한 장 한 장 만들었으니까, 그 사진 한 장에 담긴 무게가 다르겠죠. 그래서 그런지, 아빠 탈 사진 보면 진짜 힘이 느껴져요. 색도 오묘하고, 표정도 살아 있고… 아빠, 어거 완전 ‘아날로그 갬성’이예요. 근데 요즘은 오히려 필름 사진 다시 유행하잖아요. MZ 세대들은 “필카 갬성” 찾으려고 일부러 필름 카메라 사고, 암실 체험도 하러 다니고… 아빠가 그거 보면 어떤 생각 들어요?
아빠: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필름 사진에 다시 관심 갖는 거 보면 반갑기도 하고, 좀 신기하기도 해. 어쨋든 사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어떤 방식이든, 결국 중요한 건 자기가 뭘 담고 싶냐는 거지.
탈’ 전에 부처
나는 몇 해전 부터 사진가 박옥수에게 우리 전통탈의 소재지와 연희자들을 소개해왔다. 그는 꼭 나비 채집가가 나비를 한 마리 한 마리 소중히 ‘스크랩'하듯이 탈 사진을 정성스레 모아가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그의 성격대로 우직한 아주 정공법의 탈사진첩이 어언 두툼해 졌다. 그런데 벌써 1년이나 전인가 넌지시 나를 자신의 작업실로 부르더니 깜짝 놀랄 몇 장의 탈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 ‘스트레이트(Straight)’ 사진에 탐닉한 작가인가 싶었는데 너무도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암실작업을 통하여 작가의 생각에 따라 명암을 분리하고 또 그 농도별로 선과 빛깔을 넣고 빼면서 이른바 ‘포스타리제이션(Posterization)’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몇 장의 사진을 더 내놓으면서 ‘스트레이트'사진은 정직한 탈사진이 필요할 후손을 위하여 잘 보관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사진가 박옥수가 재조명(再照明)한 우리의 탈들, 아니 과감히 분해하고 조합하고 새롭게 해석한 그의 탈사진들을 보며 늦게나마 우리의 탈도 다방면의 전문인에 의하여 본격적인 인식의 단계로 접어들었는가 싶다.
- 민속학자 故 심우성 글 (1991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