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less Moments of Korean Art Masters
딸: 아빠, 나 요즘 국악을 다시 보게 됐어요. 얼마 전까지는 국악 하면 좀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최근에 내 친구 지민이를 통해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지민이 초대로 남산골한옥마을 안에 있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국악공연도 보고 국립극장에서 하는 창극공연도 봤는데 너무 재밋고 인상적이었어요
아빠: 그랬구나. 맞아. 요즘에는 아주 재미나게 잘 만들더라구. 너희 세대에게는 또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텐데 그런 것들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거니?
딸: 지민이 딸이 이번에 국립전통예고를 갔자나요. 아빠 사진집 ‘예인’을 선물했는데, 신기하게도 거기에 등장하는 분들을 나보다 더 잘 알더라구요. 나는 진짜 아는 사람이 안숙선, 박동진 뭐 이 정도? 텔레비전에서 좀 봤던 분들이나 공옥진여사 같이 유명한 분들이나 알까말까자나요. 근데 처음에 등장하는 박귀희 여사가 전통예고 창립자라면서 지민이가 아빠가 어떻게 이분들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하더라구요!
아빠: 박귀희 선생님이라… 대단하신 분이지. 1960년 국악예고를 설립하고 나중에 학교가 이전한다고 하면서 전 재산을 기증하신 걸로 유명하지. 그 때 당시에 자신이 가진 전 재산 38억을 말이지. 그게 88년도니깐 지금 같으면 강남아파트 열채도 넘는 개인 돈을 국악교육 잘 하라고…
딸: 와아~ 우리나라에 그런 분이 있군요. 정말 어른이시네요. 어른.
아빠: 그 국악고등학교에 그 분 동상이 있어. 그걸 만들기 위해서 사진을 찍게 되었지. 그 당시 박범훈씨가 모시고 왔어. 박범훈씨가 국악고등학교를 나왔거든.
딸: 아! 저 어렸을 때 명동성당에서 뵌 적이 있어요. 지휘하시는 분이 아니신가요?
아빠: 그 양반이 원래 대단한 피리 명인이야. 그런데 나중에 일본유학을 다녀온 다음에는 작곡을 직접하고 지휘를 한거지. 그 당시 박범훈씨가 아주 잘 나갈 때 였어. 중앙대학교에서 중앙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서 작곡한 곡들로 연주도 많이 하고 했어. 박범훈씨의 곡은 백대웅선생님하고 색깔이 많이 달랐어. 백대웅 선생이 정통적이라고 하면 박범훈씨의 곡들은 좀 더 대중적이고 듣기 편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이 연주가 되었지. 아무튼 박범훈 씨가 박귀희 선생님을 아빠 스튜디오로 모시고 와서 찍어달라고 해서 그 자리가 만들어졌어. 박범훈 씨도 내가 뚝딱 아무렇게 찍는 사람이 아닌 걸 잘 알았고 아빠를 인정해주었거든. 내가 잘 찍는다고 생각하고 와서 ‘박 형 사진 하나 찍어주세요’ 하니 아빠가 찍게 된거지. 이게 공연 팜플렛 찍는 것도 아니었고 해서 어른을 모시고 점잖게 찍은 사진이 그 사진이 되었어.
딸: 그러게요. 나는 잘 몰라서 박귀희라고 찾으니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가야금병창 전승자로 나오는데 그 사진이 딱 아빠가 찍은 사진이더라구요!
아빠: 그래 그 시절 참 열심히 예인들 사진을 찍었지. 대부분 보면 그 때 이미 80~90살 이런 어르신 분들이 많았어. 그리고 그 시절에는 차가 없는 사람들도 많았거든. 그래서 아빠 스텔라 차 기억나지?
딸: 그럼요. 아빠가 10년을 넘게 끌고 다닌 차죠. 금색 스텔라 ㅎㅎ 그 덕에 나도 첫차가 금색 베르나였자나요. ㅎㅎ 아빠가 하도 깨끗하게 잘 써서 마지막에 자동차 박물관인지. 개인 소장인지로 갔던 것도 기억나요. 그러고 보니 아빠 차도 엄마가 다 사주고. 캬~ 사랑이 넘친다 넘쳐.
아빠: ㅎㅎ 그래그래 아빠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소리를 또 하려고 그러지? 암튼 마무리하자면 그 당시에도 예인분들이 거의 내일 모레 어쩌고 할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내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가서 차로 모시고 와서 스튜디오에서 찍고 다시 모셔다드리고 했지. 그 중간에서 심우성선생님이 다 역할을 하신 것이고, 나한테 심 선생이 ‘박선생님, 그 어른이 스튜디오까지 오시기가 어려우신 것 같은데 박선생이 좀 모
오셔서 모시러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단번에 ‘그렇게 해야죠!’ 하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내가 모시러 간다'고 한 경우들도 있었고… 그리고 사실 항상 사진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언제 어디서 공연하는데 거기 와서 찍으라고 하는게 대부분 예인분들의 첫마디였지. 그래서 나도 심선생님하고 현장에 많이 다녔고. 그런데 심선생님이 현장 사진과 스튜디오 사진이 다르다는 것을 딱 아시고, 스튜디오로 오도록 하셨지. 제대로 된 인물사진으로 예인들 사진이 많은 게 그 이유인거야. 그 시대에 한참 90년 전후까지 그렇게 예인들 작업을 했어.
딸: 와아~ 아무튼 심우성 선생님 때문에 사진을 많이 찍었네요.
아빠: 그렇지 또 심선생이 하여튼 그 바닥에서의 위치는 누가 범할 수 없는 거니까 그걸 거절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였을꺼야.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항상 생각하지. 심 선생 때문에 예인이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사진을 찍으면서 점점 알게 돼서 눈을 뜬 거고, 찍다 보니까 재미있게 된 거지
딸: 오호라~ 아빠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아빠: 민속, 민족 그쪽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구석이 있지. 특히, 무당들에 대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면에서 터부시 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힘들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교육받은 게 있자나. 그거야 뭐 방법이 없지
딸: 맞아! 엄마가 하느님 믿는 사람이 무당들 굿하는데 쫓아다닌다고 잔소리 좀 했었는뎅. 아빠는 굿하고 칼춤 추고 막 이러면 무섭지 않았어요?
아빠: 사실 나는 그런 것은 없었어. 사실 나는 처음부터 거기에 특별한 감정이나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제3자의 입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했을 뿐이야. 다만, 낯설긴 아빠도 마찬가지였지. 그런 풍경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저런 세계도 있구나’ 싶어 신기했고, 흥미로웠어. 무엇보다 심 선생님이 늘 친절하게 설명해주셨기 때문에, 그 현장을 무서운 종교의식처럼 느끼기보다는 우리 전통 속에 오래 이어져온 귀한 문화유산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일제강점기 이후로 우리 민속문화의 많은 부분이 ‘미신’으로 취급되었잖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굿 같은 것도 원래는 공동체의 제의였어.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무당이 곧 제사장이었고, 우리 토속신앙은 기도하고, 빌고, 치성을 드리는 그런 실천에 가까웠지. 예를 들면 맑은 물 한 그릇 떠놓고 마음을 모아 비는 장면 같은 것들. 지금도 몽골이나 안데스 같은 데 가보면, 똑같이 이어지고 있는 풍경이야.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을 미신이라 부르며 밀어냈지. 그리고 이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다 보니까 저 다음에는 뭘 하겠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사진찍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수준이 되더라구 ㅎㅎㅎ 그리고 심 선생은 항상 어디 굿판에 가면 ‘여기 천주학쟁이가 왔어요~’하고 나를 소개했었어.
딸: 그러니깐 무당 굿하는데 천주학쟁이가 가서 사진을 찍는다는 거자나요? 아무튼 민속학자 심선생님과 같이 일하느라 천주학쟁이가 고생하셨어요~ 뭔가 종교를 넘은 대통합인가?
아빠: 그렇게까지 거창한 해석을? ㅎㅎㅎ 사실 무서워 보여도 굿을 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다 좋게 하려고 하는 거잖아. 대부분 스토리의 전개는 죽은 사람은 좋은 데 가게 하는 것과 산 사람들은 좋은 곳에 간 조상 덕을 받고 뭔가를 잘 되게 복을 기원하는 현실적인 욕구니까. 우리 옛날 음악, 특히 경기민요 같은 거 말이야—그 뿌리를 따지고 보면 거의 다 무속음악이야. 옛날에 무슨 작사가, 작곡가가 따로 있었겠냐. 그냥 사람이 흥얼흥얼 부르다 보면, 옆 사람이 거들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 얹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된 거지. 그게 반복되다 보면 자연스레 사설이 생기고, 곡이 붙고, 어느새 민요가 되고, 판소리가 되는 거야. 탈춤도 다 스토리가 있잖아. 굿도 마찬가지야. 천도국, 망자굿—그러니까 저 세상으로 떠난 분들에 대한 회한 같은 거지. 천신구, 천덕구, 별별 고를 풀어준다고 해서, 광목천에다가 매듭을 맺고, 그걸 마지막에 쫙 풀어내면, 마치 사람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아. 규칙대로 묶으면 규칙대로 풀려. 그게 참 묘한 거야.
딸: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라는 이야기죠? 그리고 그 광목천은 안 풀리면 망하는 거고?
아빠: 그렇지, 안 풀리면 끝장이지. 그러니까 그걸 보는 가족들이나 참여하는 사람들한테는 간절한 거지. ‘이 한을 풀어야 된다.’ 예를들면, 큰 춤판에서 사람들이 광목천 들고 중앙을 가르며 나가는데 그게 그냥 퍼포먼스가 아니야. 무속에서 마지막에 무당이 천을 가르며 맺힌 한을 풀어내듯이, 그 춤에도 같은 정서가 흐르고 있는 거지. ‘예인’사진집에도 나와. 장순향 선생이 이순신 장군 앞에서 했던 모습. 그게 2018년 10월에 장순향 선생이 여순항쟁(여순사건) 7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위령제때 사진이야. 이건 종교 가 아니라, 민족의 정서 그 자체인거야.
딸: 참 대단한 거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종교니 미신이니 하면서 터부시 하니까, 이런 게 그냥 묻히는 것은 많이 아쉬워요.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면 좋겠는데… 이건 제 얕은 생각이지만, 살짝 재미나게라도 풀어내야 더 오래 살아남을 텐데.
아빠: 그러게 요즘 무당들은 유투브도 열심히 하더라. ㅎㅎ
딸: 교수님부터 무당까지 ‘예인’사진집은 정말 다방면의 우리나라 예인들을 담은 보물같은 책이네요.
아빠: ‘예인’을 보면 백대웅 선생도 있고, 박범훈 씨 사진이 있고, 가야금 명인 김해숙 그리고 작곡하는 이병욱씨라고 있어. 기타 치고 독일 유학 갔다 온 사람인데, 이병욱씨는 서원대교수를 중심으로 1987년에 국악하고 믹스를 해서 ‘어울림’이라는 그룹도 만들고 아빠가 그 CD자켓도 찍고 했지.
딸: 기억나요! 어울림! 난 그거 많이 들었어요! 가야금이랑 신디사이저랑 기타랑 말 그대로 잘 어울리는 음악이 듣기 좋았다구요,
아빠: 그게 언제냐? 그런 CD들은 이제 다 없겠지?
딸: 그렇게 된 거구나. 누가 찍은 지도 모른 사진이 알고 보면 아빠가 찍은 게 많을 것 같네요.
아빠: 그렇지. 중요한 것은 아빠 사진이 의미있게 잘 쓰이고 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빠의 좋은 사진들이 나올 기회가 있으면 좋지.
딸: 그래서 아빠가 SNS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니깐요? 뭐가 언제 터질지몰라~ㅎㅎ 그리고 참 저번에 아빠 SNS 조회수가 갑자기 팍 튀었던 게 병신춤 공옥진 여사 사진을 올린 날이었다면서요.
아빠: 그러니까 말이다.’ 예인’ 인별은 방문자가 거의 없는데 갑자기 500명 넘게 ‘좋아요!’가 생겨서 깜짝 놀랐지. 공옥진 씨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많이 알잖아. 병신춤이라고 그러지. 근데 사실 그 병신춤이라는 것 자체는 어떻게 보면은 유흥거리로 췄던 춤이야. 그러니까 이제 술 안주감으로 췄던 춤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리고 공옥진 씨도 심우성 선생이 발굴해가지고 공간 사랑에서 공연을 했어. 그것 때문에 그 춤이 알려진 거야. 그러면서 공옥진이 누구냐 따지다 보니까 그 공 씨 집안에 창하는 사람, 춤 하는 사람… 아주 재주가 많은 집안이었고 그런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여사가 태어난 거지. 다 그 집안 자체가 내력이 있었는데 공옥진여사가 서울에서 데뷔를 한 거지. 공옥진 여사 아버지가 판소리 명창 공대일이라는 사람이고, 그 손녀가 너희들도 아는 가수 공민지가 있지.
딸: 2NE1 공민지요?
아빠: 응 그래 그 공민지. 아빠가 2NE1이 먼지 어찌 알겠니? 갑자기 공옥진씨 사진이 조회수가 올라가서 왜 그런가 나름데로 연구를 한 결과지. 아마 공민지가 유명한 연예인이다 보니까 어찌어찌 연결이 되었나봐. 더 자세히는 나도 모르겠구나 ㅎㅎㅎ. 별일이 다 있다 싶은데, 얼마전에는 아빠가 사진을 찍은 곳에 송가인씨 엄마가 있었다며 맞냐고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내가 송가인씨 엄마가 거기에 있었는지 어찌 알겠니? 30~40년 전에 찍은 사진이고 그때라면 송가인씨 엄마가 있어더라도 사진에서는 아가씨 같은 사람으로 찍혔을텐데 말이야. 진짜 찍힌 것이면 우연이지만 영광인거고, ㅎㅎ
딸: 진짜? 여기에 그 유우명~ 트로트가수 송가인의 엄마가 찍혔대요?
아빠: 책이 나오고 처음에 내가 윤중강씨한테 한 박스를 보냈어. 그 사람은 친절하게도 자기가 나눠준 사람들을 일일이 누구인지 다 알려주고 했지. 말하자면, 아빠의 사진을 알아볼만한 사람들에게 애써서 다 나눠준 거야. 나한테 카톡 인증사진도 보내주고 했거든. 그 중에 진도 씻김굿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빠는 그 분야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깐. 그러다가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
딸: 참 재미있는 일도 있고 좋으네요. 아빠책이 꼭 필요한 데가 있을거예요. 어쨌든 ‘예인’은 ‘시간여행’, ‘뚝섬’하고는 좀 색깔이 다른 것은 확실해요. 그 책 한 권을 만들도록 백대웅선생님, 심우성선생님이 많은 역할을 하셨던거 같아요.
아빠: 그렇지! 윤중강씨가 써준 서문에 그런 이야기들이 다 녹아있어. 그 분이 안 썼다면은 내가 제일 뒷 페이지에다가 그런 이야기들을 짧게 쓰려고 했었지. 모든 것이 심우성 선생님이 마련해준 덕으로 보물처럼 이 책에 나오게 됐다는 그렇게라도 짧게 글을 쓰려고 했지. 그런데 내가 굳이 쓸 필요도 없게 윤중강씨가 아주 잘 풀어 써줘서 고마웠지. 아무튼 그 이는 아주 인기가 대단해. 지금 국악계에 행사나 공연 사회를 지금은 윤중강씨가 1인자야. 제일 잘 팔려. 사진집 예인 서문도 잘 써줬고!
딸: 그랬구만요! 그래서 그런지 글이 아주 좋더라구요. 아빠에 대한 이야기, 아빠 사진에 대한 이야기, 아빠 주변에 대한 이야기까지 잘 나와서 좋드라… 암튼! 그 좋은 책이 안 팔리는게 너무 아쉬워요.
아빠: ‘뚝섬’도 어찌어찌 책이 팔려서 2쇄를 찍었는데, 이게 또 2쇄 찍은 것은 안 나가서 출판사에서 쌓아놓고 있겠지?
딸: 그나마 ‘뚝섬’은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5월 12일에 딱 출판을 해서 1쇄가 다 팔린 것이 아닐까요?
아빠: 아무튼 난 사진집이 그렇게 팔렸다는게 신기하다. 내가 유명한 사진작가도 아니고… 뚝섬 사진집이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사주다니 참 고마운 일이지.
딸: 진짜 고마운 일이죠! 근데 앞으로 아빠를 좀 더 알게 되고, 아빠의 사진을 알게 되면 역주행을 할 수도 있쥬. 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예인’같은 책도 막 팔리고, 예고나 대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이고 하면 좋겠어요. 국악하는 사람들한테 다 사보라고 해야 한다니깐요. ‘시간여행’이랑 ‘뚝섬’도 많이 팔려서, 아빠가 내고 싶다는 ‘어머니’, ‘어린이’ 사진집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럴 때는 진짜 내가 돈이 진짜 많아서 아빠 책을 팍팍 내주고 싶네.
아빠: 워워워~ 우리 딸! 이미 충분합니다. 내가 너 사정 뻔히 다 아는데… 지난번 아빠 전시회 대관료도 척척 다 내주고, 아빠 사진들고 미국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고… 아빠는 아주 행복한 사진작가지. 농담 같은 말이지만, 진정 이 아빠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맞는 거 같다. 평생 아빠를 후원해주는 아내와 딸과 아들이 있으니.
딸: 그건 그렇지요 ㅋㅋ 이제 인정하시나요? 아빠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니깐요~. 근데 아빠 난 이렇게 가까운 사람, 식구들 한테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정말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두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아. 아주 인생이 난리 부르스고 예술가라고 술도 많이 마시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그런 예술가도 있겠지만, 나는 아빠를 보고 자라서 그런가 약간 스님 같기도 하고 또 신부님 같기도 한 고집쟁이고, 한 우물 파는 조용한 구도자 같은 예술가인 아빠가 더 익숙하고 존경스러워요. 다만, 달달함이 한 스푼쯤 추가되었다면 더 좋았겠지요 ㅋㅋ
아빠: 뭬야? 아부지를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딸: 흐흐흐. 아니야 아빠. 요즘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달달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계속해요~
아빠: 그래도 이 녀석이!?!